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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정혁 Apr 16. 2021

(초단편소설) 칠십팔 보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비 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 한다. 바람도 불고 비도 오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 마치 이런 질문 끝에 비바람이 부는 날엔 우리 집이라는 것처럼 아침 댓바람부터 사람들이 찾아왔다.


“귀중품만 챙기시고 저희가 전부 알아서 하니까 걱정 붙들어 매시고요.”


걱정 붙들어 매란 말을 요즘 사람들이 입말로 쓰기는 했던가. 온통 백발에 빨간 작업복 조끼를 입고 머리 위가 휑한 할아버지뻘 되는 사람이 내뱉은 첫말이었다. 그 옆으론 작업복 차림의 덩치 큰 젊은 남자 둘이 있었다. 둘 다 짧게 걷어 올린 소매에 용 문신이 슬쩍슬쩍 드러났다. 굳게 다문 입술까지 더하면 차라리 그들은 문 앞에 버티고 서 있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비바람 오는 이삿날 아침 풍경이 이러했다. 아침이라고 하기도 애매할 정도로 시계는 새벽 다섯 시 이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토요일 이 시간이면 이제 막 잠든 지 두 시간이나 됐으려나. 한 달 전 상담한 이사 업체는 폐업 전 마지막 이사가 될 것이라며 가격을 다른 업체보다 절반이나 싸게 불렀다. 꺼림칙했지만 한 푼이 아쉬워 따질 상황은 아니었다.


이사 업체 사장은 바람이 불고 비가 오더라도 아무 이상 없이 이사가 안전하게 진행되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마치 이사 업체 사장이 아닌 기상청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게 꼭 들어맞았을 뿐이다. 그렇더라도 이렇게 일찍 오겠다는 설명은 일언반구도 없었다. 아무리 이삿날이 바삐 움직이는 날이라고 하더라도 아침 다섯 시 이십 분은 너무한 거 아닌가.


나보다 더 야행성인 아내는 아직도 꿈나라였다. “이삿짐센터가 빨리 왔나 봐. 일어나.” 안방에 들어가서 아내를 깨웠다. 아내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고 표정으로 말했지만 굼뜰 시간이 없었다. 덩치 둘이 이미 건넌방에 들어가서 박스 테이프를 뜯는 소리가 났다.


겨우 열두 평 남짓 되는 아파트 월세 생활은 사실상 안방과 건넌방의 경계가 요원했다. 아내는 자신을 달래는 내 대답 대신 박스 테이프가 요란하게 뜯기고 덩치들이 딱딱한 워커발로 건넌방을 우걱우걱 걷는 소리에 집중했다. 우리는 엉거주춤 옷을 챙겨 입고 아파트 복도에 나와서 난간 밖을 내다봤다. 또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하는 아침이었다.


“소나기 같은데 시원하게도 내리네.” 덩치 둘을 이끄는 왕초가 우리 옆에서 주절거리며 담배를 피웠다. 비는 세차가 내렸고 창문 없는 복도로 비바람이 들이치기도 했다. 왕초를 보며 곱씹어보니 나와 아내는 첫 신혼집이라며 아파트 복도에서도 담배를 피운 적이 없었다. 아내는 왕초 쪽을 몇 번 곁눈질하더니 내게 담배를 달라는 손짓으로 손가락 두 개를 꺼내 입에 가져다 댔다.


“비 오는 날 이사하면 잘 산다며?” 첫 연기를 내뿜은 아내가 말했다. “여기나 거기가 같은 월세인데 크게 뭐 나아질 게 있을까.” 나도 모르게 크게 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담배는 조용히 타들어 갔다. 비바람은 멈출 줄 모르고 몇 차례 복도로 들이쳐 아내와 나의 옷깃을 적셨다. 등 뒤로는 덩치들이 박스 테이프를 뜯고 붙이며 현관과 집안을 젖은 워커발로 채웠다. 아내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담배꽁초를 대충 복도 밑으로 떨어트렸다. 비는 세차게 내렸고 서로 똑같은 생각을 하는 것처럼 서 있었다.


얼마 뒤 왕초 할아버지가 다 됐으니 집 안을 마지막으로 확인하라고 했다. 낡고 좁은 집 바닥엔 덩치들이 남긴 워커 발자국이 거뭇거뭇했다. 안방에는 전에 살던 사람이 남기고 간 오래된 침대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이제 우리 침대도 없네.” 아내가 심드렁히 말했다. “그래도 매트리스는 우리 거잖아.” 복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덩치 둘은 일 층에서 트럭에 쌓인 세간 살림 제일 위로 매트리스를 올리고 있었다. “먼저 가서 내리고 있을게요.” 왕초 할아버지는 아까까지만 해도 우리 옆에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아내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 층으로 내려갔다.


“소나기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네.” 괜한 헛헛함에 어제 보지도 않은 일기예보를 본 척했다. 이사 갈 집은 정확히 칠십팔 보만 걸으면 됐다. 다세대 주택 월세였지만 지금처럼 아파트가 아니니 그만큼 조금은 넓어질 터였다. 아내와 나는 사전에 책상을 어디에 두고 옷장을 어디에 둘지 몇 번이나 그곳을 오가며 상의해 걸음 수까지 외웠다.


아내는 말없이 내 팔짱을 꼭 꼈다. 우리는 비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산을 꼿꼿이 썼다. 비가 오른쪽에서 들이치면 나는 오른쪽에 선 내 쪽으로 우산을 기울였다. 비가 반대로 들어오면 반대인 아내 쪽으로 우산을 고쳐 잡았다. “안에 청소 다 해뒀으니까 신발 벗고 옮겨주세요.” 트럭 앞에 다다른 칠십팔 보에서 나는 덩치들에게 크게 말했다. 어느덧 비는 그쳐 있었다. 왕초가 말한 소나기가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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