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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정혁 May 11. 2021

(초단편소설)분유를 탈 때 내가 생각하는 것

비 오는 날은 몸이 찌뿌둥하다. 이런 것은 잊고 사는 것들을 불러온다. 어떨 때엔 과거의 좋았던 추억에 잠기고 어느 때엔 삶의 구렁텅이에 빠졌던 것처럼 좌절했던 시기에 잠식된다.


이 사이 간극은 비가 얼마나 오고 하늘의 잿빛 농도가 어떤지와 관계없이 무작위적이다. 그러므로 이런 분위기는 비가 오고 몸이 축축 처져서 몸 대신 머리가 활성화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비가 오니까 으레 모두가 감상에 빠진다고 하므로 나도 그런 학습의 결과로 반응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지경이다.


어쨌든 이런 상념 끝에 다다르면 어느 순간 저 멀리 우산을 쓰고 종종걸음으로 뛰어가는 사람을 보기 마련이다. 우산을 쓴다는 행위는 무엇인가. 머리는 가렸는데 뛰어가는 그 사람 신발과 바지 밑단은 매번 젖는다. 우산 밖으로 이따금 튀어나오는 팔 끝은 또 어떤가. 여름이어서 반팔이라도 입었다면 다행이지만 그게 아닌 긴소매 옷이라면 축축함은 더해진다.


몇 해 전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날의 기억도 이런 눅눅함을 빼곤 논할 수 없다.


정말이지 누군가 내일 있을 단수에 대비해 세상이란 욕조에 물을 받는 것처럼 하늘에서 수도꼭지를 열어둔 날이었다. 동네에 조그맣게 하나 있는 개천 수위가 눈에 보일 정도로 불어나고 있었다. 바람은 행인들이 우산 쓰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비바람으로 불어 닥쳤다. 우산을 쓰고 어딘가를 쏘다닌다는 것은 꼭 그래야만 하는 상황이 아니면 피해야 하는 날이었다.


그렇지만 꼭 그래야만 하는 상황은 언제고 벌어진다. 그게 하필이면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이어야 한다는 그런 머피의 법칙 같은 마법은 그날도 이어졌다.


저쪽에서 먼저 떠내려 오고 있었다. 사람이 개천에서 휩쓸려 오는데 이걸 '떠내려왔다'라고 밖에 쓸 수 없는 것은 정말이지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고무 튜브를 허리에 끼고 내 쪽으로 밀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개천에서 그 누구라도 물장구를 치거나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맑은 날도 그러했으니 개천은 말 그대로 동네에 있는 개천일 뿐이었다. 비가 그치면 물이 뒤집혀 이러저러한 쓰레기가 뭍에 쌓이고 잊을 만하면 비가 그것을 다시 뒤집어 덮어 가져가는 식이었다.


그런데 꼬마 아이가 비바람이 억수 같은 날 튜브를 끼고 내 쪽으로 떠밀려 내려오고 있으니 나는 그 찰나의 순간 발이 얼어붙은 것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도대체 저 튜브는 뭐고 그 튜브가 둥둥 떠다니는 곳이 왜 하필 이런 개천이며 그 개천이 뒤집히는 가운데 왜 내 앞으로 꼬마가 떠밀려오는 것인가. 짧은 순간이지만 아이는 어디서부터 밀려왔는지 덥수룩한 머리가 물에 젖어 앞머리는 갈라져 있었고 튜브는 그저 잠식되었다가 다시 조금이라도 떠오를 수 있는 도구에 불과했다.


아이의 머리는 물에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영웅이 필요했다.


실제로 이런 식의 상황에선 영웅이 나타났다. 이를 테면 누군가 뛰어들어 아이를 구하고 그 아이의 부모를 찾아준 뒤 지역 신문에라도 조그마하게 실리는 그런 미담이 있어야 했다.


영웅이 등장하고 탄생하는 그 상황에 나와 아이는 놓여있었고 내가 그렇게 영웅이 되었더라면 아이는 내게 세상 가장 천진난만하고 감사한 표정을 지을 것이고 아이의 부모는 눈물을 흘리며 연신 고맙다는 말과 함께 내 손을 꼭 부여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상상 속 가상현실 미담이었다. 주사위는 내 손에서 던져지지 않은 채 아직 껍질이 벗겨지지 않은 호두처럼 맴돌고 있었다. 호두는 딱딱 소리를 내며 손 안에서 돌고 돌았다. 나는 얼어붙은 두 발을 꼼짝달싹하지 못했다.


내가 수영을 할 수 있으며 해군으로 전역한 사람이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채 나는 저 안에 뛰어들어 물살을 가르는 시뮬레이션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비바람은 몰아쳤고 당연한 물리적 이치로 아이는 내 눈앞까지 다가왔다가 내 등 뒤로 가파르게 밀려 내려갔다. 아이가 내 눈앞에 왔을 때 무언가 소리를 지르는 것을 느꼈는데 무슨 소리인지는 정확히 듣지 못했다. 나는 밀려가는 아이와 끝내 눈을 마주쳤고 피하고 싶었고 그래야만 했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우리 사이 잠깐의 눈빛 교환으로 동물적 교감이 담긴 스파크는 튀었지만 나는 아이의 입모양이 움직이는 것을 집중해 봤을 뿐 내 귀엔 빗소리와 바람소리밖에 입력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그 아이의 눈을 보면서 집에서 곤히 자고 있는 이제 막 만으로 세 살이 되기 직전인 내 아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내가 저 물에 뛰어들었다가 혹시라도 잘못되면 내 아이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아이가 내 눈에서 사라졌을 때 그런 생각이 번뜩였다. 그러니 그 앞에서 최악의 상황이 되었을 경우 그 행위의 근거로 읊조려야 하는 죄의식은 무엇인가. 이런 상황에서도 나는 가슴속 저 밑에 있는 그런 단어를 개천이 바닥을 뒤집듯이 끄집어내서 그런 것을 느껴야 할까.


집에 돌아와 어떤 사명감과 죄의식 한가운데에 놓여 내면의 갈지자 행보를 걸었지만 나는 아내한테도 이런 얘길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그저 아내는 비바람이 부는데도 계산 착오로 똑떨어진 분유를 사러 간 것은 고맙지만 생각보다 내가 너무 늦게 돌아오는 바람에 아이가 울다가 지쳐 잠들었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


그날 그 순간에도 창밖으로 비바람은 여전했다. 내 안에선 집에 있는 아이의 안위에 안도하는 동시에 죄의식이라는 단어가 저 밑에서 스멀스멀 뒤엉켰다.


그렇지만 그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발설하지 않는 이상 저 개천 밑에 깔린 쓰레기 하나만도 못한 것이었다. 누구도 살면서 나를 끊임없이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알아내기 힘든 그 어떤 밑바탕일 뿐이었다.


막 지쳐 잠들었다는 아이가 다시 울기 시작했다. 아내는 며칠 전 참치 캔을 뜯다가 손가락을 베었다며 새 분유 깡통 좀 벗겨달라고 화장실에서 멍하니 손 씻는 나를 불렀다.


통을 열어 분유 네 스푼을 젖병에 넣고 백 육십 미리의 물을 부었다. 분유와 물이 담긴 젖병을 기도하듯 두 손에 낀 채로 흔들었다. 젖병에 공기가 들어가지 않게 하려면 분유를 넣고 이렇게 흔들어야 한다고 아내가 알려준 방식이었다. 분유가 물과 섞이면서 젖병 물 양이 백 육십에서 백 오십으로 줄었다. 다시 젖병 뚜껑을 열어 물을 보충하고 기도하듯 섞었다.


“그만하면 됐어. 계속 울잖아.”


멍하니 손 비비는 나를 보며 아이가 울고 있으니 빨리 달라고 아내가 채근했다. 나는 분유를 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기도하거나 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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