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당신에게 그리운 집밥이 있나요?"
만약 그렇다고 대답했다면 그 식사는 아늑한 집에서의 사랑이 가득 담긴 한 끼이거나 혹은 힘든 시절의 위로가 되어준 한 끼일지도 모르겠다.
"여보, 당신은 기억나는 집밥이 있어?"
내 질문에 고개를 번쩍 들고 잠시 생각하던 남편이 이내 싸한 표정을 지으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아니."
어린 시절을 반추하니 상처가 되씹혔나 보다.
솜씨 좋은 시어머니가 맛깔나게 요리를 해주셨을 텐데 아버지와의 불화가 맛있던 기억마저 온통 검게 먹칠을 했나 보다.
집밥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꼭 행복한 가정에서 자라지 않았더라도, 집밥은 어린 시절의 따뜻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가 된다. 특정한 맛과 향이 과거의 한 순간을 소환하기 때문이다. 나는 동지에 팥죽을 먹을 때면 할머니의 팥죽이 생각난다. 동시에 언니, 동생과 수다 떨며 새알을 곱게 빚었던 기억, 할머니가 짭짤한 동치미와 함께 내주셨던 팥죽의 달달함, 온 가족이 둘러앉아 맛있게 먹던 훈훈함이 저장된 챕터에서 팝업 되어 보인다. 그리운 그때여!
유학하던 시절 어딘가 탈이나 아플 때면 그렇게 엄마가 해주는 집밥이 먹고 싶었다. 엄마의 밥을 입에 넣으면 낯선 유학지에서의 외롭고 서러운 내 마음을 안정시켜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끔 한인교회 어른댁에 초대받게 되면, 함께 나눌 고향음식을 생각하며 얼마나 설레고 기다려졌는지 모른다. 그렇게 타지에서의 집밥은 향수병을 달래주며 따뜻함과 위로를 건네주었다.
어릴 적 가정에서 아픔을 겪었더라도 어른이 되고 난 후 필요한 것은 결국 가정, 곧 집이다. 세상이 나를 속일지라도 집은 내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준다. 1인가정이든 한부모가정이든 그 형태는 상관없다. 나를 보호해 주는 공간에서 차려지는 집밥은 세상에 지쳐 돌아온 가족, 혹은 나 자신에게 소중한 안정감과 휴식을 제공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몇 년간 남편이 정성껏 차려준 집밥은 가정의 회복을 가져다주었다. 그의 새 정체성, "셰프"는 이혼위기에 내몰려서야 발견된 것이지만, 아픔을 이겨내고 회복을 이루기까지 그가 말로다 하지 못한 미안함과 감사, 행복, 응원 등이 그 음식 속에 담겨있다. 그런 아빠의 밥을 먹고 자란 아이들의 안정지대는 더 단단해졌다고 확신한다.
소소하지만 따뜻한 집밥이 그대 곁에 늘 함께하길 바라며 연재를 마친다.
[요리하는 남편은 사랑입니다]를 재미있게 읽으셨나요?
'그냥 먹고 없애기엔 아까워.'
남편이 요리하는 모습과 음식을 보며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음식보다 속내를 더 많이 보인 것 같아요. 음식 레시피인 줄 알고 오셨다가 당황하지는 않으셨나 모르겠어요.
먹고 살아가는 것은 바쁜 일상에서 너무 사소하기도 하고 때론 중하고 귀하기도 하지요.
버거운 삶에 따뜻한 위로가 되어 줄 집밥 한 끼를
친애하는 독자님들께 언젠가 대접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으며 연재를 마칩니다.
제 글을 통해 만나 뵐 때마다 첫사랑을 만나듯 설레고 행복했습니다. 라이킷과 구독을 눌러주시고, 단 한 번이라도 저의 글을 같은 호흡으로 읽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더 깊게 소통할 수 있는 글로 돌아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