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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 무해한 새해 한 끼

#카레

by 하루만

2024년이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다들 이렇게 올해를 끝낼 거야?"

뭣들하고 있는지 답답한 마음에 방구석에 박혀있는 남자 셋을 호출했다.

"맞아. 우리 진실게임하기로 했는데. 아빠~빨리 나와."

둘째가 내 손뼉에 맞장구를 치며 아빠를 닦달한다.

"뭐 한다고?"

트렁크 속옷에 티셔츠를 입고 머리를 긁적이며 남편이 걸어 나왔다.

"자, 여기 소파테이블로 모이세요."

다리깁스를 한 첫째도 손에 든 폰을 내려놓고 나오니 모두가 테이블 앞으로 모였다.

'한 해를 돌아보며 참회의 기도문을 작성해 보고 새해의 결심도 나누자는 것이 엄마의 큰 그림인데, 다들 안 하겠지?'

고민하는 순간 어색한 침묵이 감돈다.

"이걸 돌려서 해당되는 사람에게 질문을 하는 거야. 어때?"

술게임은 해본 적도 없는 내가 목공풀을 집어 들어 테이블 위에서 시험 삼아 돌려보며 말을 했다.


진실게임의 타자를 정해준 목공풀


"그런 건 술이 있어야지."

"술 없이 벌칙을 정하자. 엉덩이로 이름 쓰기."

다행히 두 아들의 적극적인 동의를 얻고 목공풀이 마구 돌아간다. 사람 앞에 멈춰야 하니 될 때까지 여러 번 돌린다.

걸렸다! 남편이 첫 타자다.

나는 서슴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관심 있는 여자가 있다 없다?"

"없다."

순간 남편이 웃음기가 싹 사라진 얼굴로 손을 쭉 뻗어 보이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무슨 그런 질문을 하냐고 할지도 모르나, 내 입에서 냉큼 그 질문부터 튀어나오는 걸 어쩐다.

여자마음이란 평생 살면서도 확인하고픈 것이며, 우리 부부 사이니 할 수 있는 농담이겠다.

"자기 자신에게 쓴 돈 중에 가장 비싼 건 얼마?"

요즘 피규어를 사고 싶어 하는 첫째가 아빠한테 건네는 질문이다.

형의 질문에서 힌트를 얻은 둘째가 연달아 말한다.

"몰래 숨겨둔 비상금은?"

'오~요것들 도움이 많이 되는데.'

질문형식으로 놀이를 해 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서로에 대한 관심도가 얼마나 있는지가 단번에 드러났고, 미처 생각지 못한 예상밖의 질문들도 나와 호기심을 자극했다. 엄마, 아빠와 게임시간이 유쾌하고 신이 나는지 흥분한 아들들의 높은 참여로 성황리에 진실게임을 마치고 새해 다짐과 덕담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난 많이 웃을게."

철없이 팔자 좋은 사람처럼 시시때때로 웃으며 사는 게 나의 새해목표다.

남편은 돈을 열심히 벌어온다 했고, 첫째는 부러진 다리를 붙들고 키가 크는 것을, 둘째는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마술을 성공하겠다고 한다.

12시가 되어 카운트다운이 들어가고 재야의 타종 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목청껏 외친다.

"해피 뉴 이어!!"

준비되어 있던 케이크의 촛불을 끄고 기다렸던 케이크의 달콤한 맛과 함께 다 같이 새해를 맞았다. 꼭 엄마아빠랑 같이 자고 싶다는 아이들을 위해 바닥에 이부자리를 펴주고 한 방에서 잠이 들었는데 말이다 글쎄, 단잠에 빠질 줄 알았던 그 밤 나는 열 번도 넘게 자다 깨다를 반복해야 했다. 아이 두 명이 돌아가면서 배가 아파 화장실을 들락거렸기 때문이다. 새해부터 무슨 일인가, 케이크가 잘못이었나 온갖 생각이 들었는데 배가 아파 끙끙거리다가 속을 비운 아이들은 다행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신년 예배를 가지도 못하고 아침을 맞았다.

"너희는 배가 아팠으니 흰 밥에 계란만 얹어서 먹자."

"엄마, 너무해. 화장실 갔다 왔더니 이제 다 나았다고."

"그래도 하루만 참자. 우리 가족의 건강한 새해가 되어야 해. 해로운 건 먹지 말고, 불필요한 자극에 노출시키지도 말고, 아름다운 것 많이 보면서 평온하고 안온한 날들을 살아가길 나는 바란단말이야."


2025년을 바라는 나의 일상은 이렇다.


남들과 비교하며 뒤쳐진다 나를 떠밀지 않을 것
지속가능한 나만의 목표를 세울 것
빨리빨리를 외치치 않을 것
복잡한 자극보단 단순한 하루를 즐길 것
평범한 하루에 감사할 것
타인의 시선이 아닌 나에게 집중할 것



새해지만 사실 기쁘게 새해인사가 나오지 않는 것은 날로 심해지는 정치적 이념 갈등과 상상조차 하기 힘든 사고소식이 마음을 무너지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일들이 없다 해도 어둡기만 한 경제 불황과 불안한 미래가 새해의 활기찬 다짐마저 시들게 한다. 하지만 반대로 행복하지 않을 건 또 뭔가 생각해 본다.


꼭 행복해야 된다는 강박이나
휘황찬란해야지만 진짜 행복이라는 착각 속에 살지는 않았는지 말이다.



나에겐 툴툴거려도 사랑을 표현할 줄 아는 아들 두 명과 가족과 같이 먹을 한 끼 만들기를 진심으로 기뻐하는 남편이 있지 않은가. 첫째 다리깁스를 풀기만 하면 사우나를 하러 갈 계획을 세우는 거창할 것 없는 이 소박한 일상이 감사고 행복이지 뭘까. 게다가 아들들과 부모가 나누는 시시콜콜한 대화가 끊이지 않으니 럭키비키라고 해두자.


"탈이 없는 음식 해줄게."

흰쌀밥을 꾸역꾸역 먹는 아이들을 불쌍하게 바라보던 아빠가 말한다. 밤에 잠을 설쳐 오후에 잠깐 졸았는데 남편이 그 사이 탈이 없는 요리를 끝내 놓으셨다. 언제 먹어도 맛있고 속도 편하다는 그 음식은 바로 카레였다. 일주일에 한 번은 먹을 너무나 간단한 카레지만 또 유달리 맛있는 게 남편의 카레다.

"여기 단무지만 있음 끝이지."

"속이 탈 난 사람한테 카레라고?"

첫째는 단무지랑 둘째는 김치랑 카레를 개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염려했지만 밤에 조용히 잘 자는 걸 보니 진심 무해한 카레가 맞나 보다.


언제 먹어도 맛있는 한 끼 카레


새해의 날들이 시작되고 있다.

2025년엔 별 볼 일 없더라도 탈이 없는 진심 무해한 날들이 우리 모두의 삶에 빼곡히 채워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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