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추운 겨울, 남편과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던 골목을 걷고 있을 때였다. 우리는 그날도 먹을거리를 찾으러 마트를 가는 길이었는데, 오래된 골목의 몇 안 되는 가게 중 하나에 우리의 시선이 머물렀다.
"자리 없어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삐그덕거리는 양철문을 열고 앉을자리를 찾고 있었다. 문이 열리며 어두컴컴한 골목 위로 펼쳐지듯 나타난 가게내부는 김이 자욱하게 서린 뿌연 연기와 노란 불빛이 빛바랜 벽지와 장판 위의 몇 개 안 되는 테이블을 감싸고 있었다. 소주잔을 기울이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 아이들과 다 같이 식사를 하는 가족, 수다 삼매경에 빠진 젊은이들의 다정한 모습은 닫히는 문과 함께 책장이 덮이듯 금세 사라져 버렸다.
"뼈.. 다귀해장국"
나는 고개를 들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낡은 간판을 따라 읽고는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
"우리는 이거 안 먹잖아."
"응. 나는 별로 안 좋아해."
"나는 먹어본 적이 없어서 무슨 맛인지 궁금해. 가족들이 같이 먹는 거 보니까 애들도 먹을 수 있나 봐."
남편이 좋아했으면 벌써 먹고도 남았겠지만, 그분의 리스트에 없는 관계로 아이들과 나는 이 음식을 접할 일이 전혀 없었다. 그러던 차 올해 추석연휴 드디어 그 맛을 보게 되었다. 갑작스럽게 연락을 드렸는데도 너무나 반갑게 맞아주신 나의 옛 영어선생님과 함께하는 식사에서 말이다. 선생님은 내가 힘들었던 순간에 날 위해 기도해 주시고 통찰과 분별의 중요성을 알려주신 참 고마운 분이다.
"뼈다귀해장국 먹어봤어?"
"늘 궁금했는데 여태 못 먹어봤어요."
애들이 과연 이 음식을 좋아할지 살짝 걱정이 됐다.
"이 집이 진짜 맛집이거든. 나도 남편이랑 종종 오는데 너희도 좋아할 거야."
뚝배기에 넘칠 듯 담겨 나오는 비주얼은 푸짐하기 이를 때가 없다. 등뼈를 잡고 살을 발라내는 데 생각보다 부드럽게 쏙쏙 빠진다. 맑은 김과 함께 풍겨 나오는 해장국의 깊은 향이 코를 자극하니 숟가락으로 조심스레 뻘건 국물을 한 숟갈 떠 입에 넣어본다.
"와~ 시원해요. 이거 안 맵고 짜지도 않아. 너희도 잘 먹겠어."
첫맛을 본 내 소감을 듣기는 하는 건지 아들 두 명은 뼈에 붙은 고기를 한 톨도 남기지 않기로 작정한 듯 살 바르기에 온통 집중해 있다. 배가 고픈 나는 국물과 살 그리고 우거지를 한 입에 넣어보는데 얼마나 고운 건지 우거지가 씹을 것도 없이 녹아 사라진다. 뼈에 붙은 살을 다 발라앞접시에 한가득쌓은 큰아들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를 부른다.
"엄마, 그렇게 먹는 거 아냐. 이렇게 발라낸 살코기를 뚝배기에 다시 넣고 밥과 함께 말아서 나처럼 먹어야 되는 거야."
먹방유튜버들이 그렇게 먹었던 건지 뼈다귀해장국을 먹는 표준을 보여주신다는 아들의 입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4살 어린 동생도 형에게 뒤질세라 코를 박고 열심히 먹는다.
아직 여름의 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뜨거운 가을이었지만, 그날의 해장국은 어려운 길에 무겁게 매인 나의 마음을 달래주는 선생님의 따뜻한 정이었다.
"저 등뼈는 가격이 참 착하네."
정육점에서 내가 손으로 가리키자 남편이 말을 받는다.
"그렇지. 저걸로 해장국 끓이는 거잖아.'
"우리도 한번 해 먹어 보자. 애들도 잘 먹던데."
본인은 안 좋아한다며 음식점 앞에서 바로 돌아서던 몇 년 전 남편은 어디로 가고, 여기 내 눈앞의 남편은 내 말에 바로 등뼈를 집어 장바구니에 담는다.
핏물을 뺀 등뼈데치기
몇 시간 동안 물에 담가두어 핏물을 깨끗이 뺀 돼지등뼈를 팔팔 끓는 물에 통후추,마늘, 월계수잎과 함께 투하한다. 한 번 데쳐낸 돼지등뼈는 흐르는 물에 씻어 새로운 냄비에 된장과 청주를 넣고 오래 끓여야 한다. 그때 해장국에 들어갈 우거지를 준비해줘야 하는데 우거지(말린 배추의 겉대)가 부족한 관계로 시래기(말린 무청)도 추가해 준다. 말린 우거지와 시래기는 물에 담가 불려주고 다시 삶아야 된다. 제대로 삶지 않으면 질기기 때문에 생각보다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쭉쭉 찢어지는 우거지가 있어야 해장국이 제 맛이 나기 때문이다.
육수를 부어 오랫동안 끓여내기
옛날부터 끓여 온 뼈다귀 해장국은 고기를 충분히 섭취하기 어려웠던 시절 고기국물의 깊은 맛을 내기 위해 뼈를 한 솥 푹 고아내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을 서민음식이다.시간이 쌓여 만들어지는 깊은 국물 맛을 위해 한참을 고아지는 들통 앞에 서 있으니 마치 올 한 해 우리 부부가 겪은 지난한 기다림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감당 못할 무게로 짓눌리는 시간을 살아내기란 말라붙은 폐로 숨을 쉬는 고통과 같다.
인생 중 누구에게나 지나가야만 하는 인고의 시간이 있다. 때론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는지 억울해하고 화도 내보지만, 결국 그 일을 내 삶 안으로 수용하게 될 때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힘과 용기 또한 부여되는 것이다. 그러니 불청객처럼 보이는 이 끝없는 기다림에서 도망가기보다는 묵묵히 시간을 끓여내는 법을 뼈다귀해장국에서 배워본다.
시간을 끓이는 뼈다귀처럼 인고의 기다림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내면의 힘과 깊이를 발견하게 되는 과정일 테니 말이다.
"사실 이거 처음 먹을 때, 고기가 크게 붙은 것도 아니고 뼈사이에 있는 거 발라 먹어야 돼서 기분이 별로였거든. 근데 뼈에 붙은 살들을 하나하나 모으니 산이 되는 거야. 그걸 또 뚝배기에 말아서 밥이랑 같이 먹으니까 꿀맛이더라고. 그니까 뼈에 붙은 살이라고 얕보면 안 돼."
자메이카 통다리정도 되어야 만족을 느끼던 큰아들이 이번엔 소박함의 기쁨을 깨달으셨다.
"이건 파는 맛은 안 나네."
자기 음식맛에도 솔직한 평가를 내리는 남편의 말이다. 그건 나도 인정. 국물맛이 없는 건 아닌데 살을 발라 우거지랑 먹어보니 아직 더 끓여야 한다. 시간이 부족하니 맛이 녹듯이 사라지며 감탄을 불러내는 지경에 다다르지 못했다.
인생도 그런 것 아닐까. 고아낸 시간만큼 맛이 다른 뼈다귀해장국되는 것처럼 살아오며 견뎌낸 시간이 가득 찰 대로 차야 풍성한 이야기와 빛깔로 삶의 맛을 더해가는 인생이 되지 않을까 하는 깨달음이 든다.
2024년을 지나온 여러분 모두 수고 많으셨고, 단단하고 다채로운 빛깔로 빚어지는 우리 모두의 2025년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