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 퇴임 후 잠시 기업 자문을 한 적이 있었다. 프리랜서인 샘이다. 마치 1인 기업처럼 회사와 계약을 맺고 원하는 분야의 일을 해주는 식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아는 건 많은데 이를 문서화하고 일정들을 배분하려니까 이만 저만 어려운 게 아니었다. 워드나 피피티 파일 작성부터 자료 찾는 것, 그리고 일정 짜기 등등 뭐 하나 쉬운 게 없었다.
사실 돌이켜 보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임원 시절 자료는 부서원들이 만들어왔고 나는 최종 수정을 거쳐 마무리만 했다. 일정도 비서가 알아서 짜 왔다. 물론 내 임무는 한 차원 다른 곳에 있었다.
안으로는 대표이사와 맞서 설득하고 조직을 유지하며, 밖으로는 고객을 유치하는, 전장의 최 일선에서 고군분투했다. 그냥 최선을 다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일이 되도록 해야 했다.
그런데 자문을 하게 된 순간 최 전선에서 맞설 일이 없어졌다. 갑자기 휴전을 맞이한 지휘관의 느낌이랄까. 그 대신 나 혼자 처음부터 끝까지 다해야 했다. 나중엔 익숙해졌지만 처음엔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있을 때 잘하는 건데." 그때 드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모든 임원분들께 말하고 싶다. 누구나 퇴임할 것을 염두에 두고 미리미리 준비해 두시라고. 피피티도 백지부터 시작해서 마무리까지 한 번이라도 해보시라고.
재취업을 한 이후로, 나는 팀원들에게 권한 위임한 것과 별개로 나 스스로도 한 파트를 맡은 것처럼 일한다. 피피티도 워드 파일도 직접 작성한다.
참 신기하다. 내가 직접 자료를 만드니까 오히려 권한 위임이 쉬워졌다. 내가 직접 자료를 만들어 보여주고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냐 하고 설명하면 팀원들은 신기해한다. 팀장님도 우리랑 같이 자료를 만드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내 말에 더욱 힘이 실리는 것 같다. 이게 솔선수범인 것 같다.
퇴임 후 기업 자문 기간이 나에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나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 외에도 새로운 리더의 모습을 배울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