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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왕고래 Feb 22. 2022

할머니는 왜 '왓츠 인 마이 백'을 보고 눈물 흘렸을까

팽현숙 씨의 유튜브를 본 우리 할머니




어르신들은 왜 꼭 TV를 틀어두실까? 


심지어는 점차 잃어가는 청력 때문인지, 볼륨의 크기도 어마어마하다. 시간에도 구애받지 않으신다. 밤낮없이 틀어두시는 것 같다. 그런 통에, 서로의 방 문을 닫지 않고서야 취침은 매우 힘든 지경이다. 우리 할머니도 그렇다. 더구나 새벽잠도 없으셔서 중간에 매우 잘 깨시는 편이다. 


이따금 화장실에 가시거나, 물을 마시러 방문을 열어두고 잠깐 나오실 때가 있다. 그러면 거대한 TV 소리가 온 집안에 요동친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방송들이 새벽에는 모두 종료되었었다. 그러나 IPTV가 거의 모든 집에 깔려있는 요즘이다. 채널들은 24시간 내내 부리나케 돌아간다.


그런 할머니에게 최근 태블릿을 드렸다. 이어폰도 낄 수 있고, 볼륨이 커봐야 TV 만큼은 아니기에 여러모로 좋았다. 이걸로 '갤러리'에 들어가서 손주들의 재롱도 보시고, 근래엔 '유튜브'까지 섭렵하시게 됐다. 버튼 하나 누르면 TV를 능가하는 콘텐츠가 쏟아져 나오다니! 할머니는 매우 좋아하셨다. 


어느 날은 댁 근처에서 일을 보다가 일찍 끝나서, 불쑥 할머니 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태블릿을 보며 감탄 중이셨다. 유튜브 콘텐츠도 제법 찾아보시는 걸 보니 새삼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할머니와 수다를 떨며, 한과도 집어먹고 함께 유튜브를 봤다. 그러다가 할머니의 알고리즘을 타고 생경한 콘텐츠가 하나 등장했다.


'팽현숙'씨의 '왓츠 인 마이 백'이었다. 


제목 그대로다. '왓츠 인 마이 백 = 내 가방에 무엇이 들었을까!'가 이 영상의 주제였다. 보통 이 콘텐츠는 젊은 연예인들이 많이 해오는 걸 봤다. 그런데 늘 최양락 씨와 투닥거리는 모습으로 기억에 남은 팽현숙 씨가 이런 걸 하다니…. 참 생소했다. 사실 큰 기대도 되지 않았다. 


내가 본 셀럽들의 가방 속에서는 요즘 핫한 아이템들이 쏟아져 나왔었다. 그래서 유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것이 트렌드인지, 궁금한 마음으로 영상을 보았다. 그러나 팽현숙 씨의 콘텐츠에는 애당초 무언가 기대를 할 수가 없었다. 그건 '세대차이'이기도 했을 것이다.


아무튼 할머니는 나에게 '왓츠 인 마이 백'이 뭐냐고 물어보셨다. 뜻을 설명해주고 나니, 나와는 다르게 매우 호기심 가득, 궁금함 가득한 할머니 표정이 보였다. 이내 모니터로 쑥 빨려 들어가듯 두 손을 움켜쥐고 화면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귀여웠다.


처음 팽현숙 씨의 가방을 들여다보는 할머니의 감정은 그저 공감대였다(나와는 너무나 반대로…). 팽 씨의 가방은 지금껏 '왓츠 인 마이 백' 콘텐츠에서 보지 못한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관절 통증이 올 때 붙일 수 있는 파스와 밴드, 온갖 지병의 약들, 심지어는 오색빛깔 찬란한 스카프들과 은단까지 나왔다. 연령대를 고려해 '그럴 수도 있겠거니~' 생각하고 있을 무렵, 이번에 등장한 것은 수 켤레의 양말이었다.


"왜 그렇잖아요? 이렇게 하루 종일 다니다 보면 갑자기 춥다가, 또 갑자기 덥다가! 그럴 때마다 바꿔 신어요. 이게 두께가 다 다른 양말이거든요. 호호호."


나는 몰랐지만 할머니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팽 씨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오호호호 맞아 맞아, 나도 가방에 이거봐라~! 양말이 세 개나 있다!"라고 물개 박수를 치는 할머니를 보며 웃음이 '빵!' 터졌다. 아니, 가방에 여러 개의 양말을 들고 다니는 것이 이렇게나 흔한 일이었단 말인가! 


불현듯 팽현숙 씨에게 고마운 맘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그간 할머니 가방은커녕 어머니의 백도 함부로 보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한참 공감이 폭발하는 표정과 반응을 보고선, 우리 집 커다란 가방들의 내부도 대략 짐작이 갔다. 거의 군장 수준이라면 맞을까. 


'이런 연령대의 어른들에게는 생존을 위한 다양한 장비들이 자리하고 있구나'하고 생각했다. 진통제며 연고는 정말 기본 아이템이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이제는 나조차 팽 씨의 '왓츠 인 마이 백'에서 튀어나올 다음 타자가 잔뜩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팽 씨를 따라서 부지런히 가방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등장한 것은 조금 더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것들이었다. 수많은 개인정보들, 자식들과 배우자의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팽 씨는 웃으며 신이 난 듯 이야기했지만, 사실 어딘가 모르게 서글픔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건 비밀번호예요. 제가 너무 잘 까먹어서..."

"이거는 우리 최양락 씨 운전면허증이에요!"

"저는 30년 동안 인감으로 천 원짜리 막도장을 썼거든요. 도장이 꼬질꼬질하고... 볼 때마다 눈물이 나."


팽 씨와 함께 열심히 가방 곳곳을 파헤치던 할머니도 잠시 멈췄다. 눈치껏 아는 체하지는 않았지만, 할머니 손에는 당신 젊었을 적 가족사진이 쥐어져 있던 것 같다. 그곳에는 앳된 모습의 우리 어머니 모습과 삼촌들, 떠나보낸 할머니의 배우자도 있었던 것 같고…. 


그러더니 얼마 안 가서 할머니의 눈가도 촉촉해졌다. 사진을 볼 때는 습기 가득하지 않았었는데, 아무래도 다른 걸 발견한 모양이었다. 하나둘 요란한 것들이 적혀있는 수첩이며 메모장이 보인다. "이걸 어쩌게요?"라 묻자 할머니는 "내다 버려야지"라고 답했다. "왜요?"라 다시 되묻는 질문에는 "이제 글자도 잘 안 보이고..."라며 애먼 이야기로 답하신다. 


사실 저 메모들은 할아버지와 관련이 있는 것들이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우리 할머니의 단짝은 퍽 많은 고생을 하셨다. 지병도 깊어서 할머니로선 챙겨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런 소소한 것들이 아직 남아있던 것이다. 이를테면, 약 복용법이라던지.


그 온갖 컬러의 펜으로 크게 크게 겹쳐 적힌 메모들이 한 움큼 쌓였다. 

하나둘 챙긴 할머니가 쓰린 무릎을 부여잡으며 일어섰다.

그리고는 쓰레기통에 휙~! 한 뭉텅이 집어넣더니만, 홀가분한 목소리로 말한다.


"팽현숙 씨 참 재미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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