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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왕고래 Feb 25. 2022

당신의 '제주 한달살이'를 반드시 비밀로 해야하는 이유

나의 제주살이를 절대로 알리지 말라!

나는 타인보다 그다지 빠른 편이 아니다. 성격도 느긋한 편인 것 같다. 삶을 경주하는 자세에 있어서도 그렇다. 한창 유행이라던 '제주 한 달 살기'도 나중에야 겨우 해봤다. 그것도 뭐 큰맘 먹고 한 것은 아니었다. 돈이 많았던 것도 결코 아니다. 


퇴사를 했고, 난 데 없이 퇴직금은 받았으며, 시간은 넘치듯 많았다. 게다가 미래의 계획이라곤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 퇴직금을 쓰러 갔다.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 추후의 계획을 도모하려고 굳이 제주로 떠나 긴 일정을 머문 것이다.




'제주 한 달 살기'를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도심(이라 말하지만 '퇴사자'에게 쏟아지는 온갖 간섭들)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1번이었다. 그 외에는 뭐, 다른 이들과 비슷하다. 자연 속에 파묻혀보고 싶기도 했고 소위 말하는 '진짜 여유'를 찾고도 싶었다. 지독하게 부딪히던 수많은 인파를 벗어나 나를 홀로 고립시키고자 했다. 이따금 스스로 고독함 내지 외로움을 찾아가는 편인데, 그때의 시기가 그러했던 것이다. 


제주에 오기 전 다양한 '실패담'도 찾아봤다. 현지 마을에서의 적응 실패, 비용 계산의 실패 등 많은 문제들이 즐비했다. 나는 아주 철저하게 준비해서 '정말 여유로운 제주 라이프를 즐기고 오리라!' 되뇌었다. 그리 만만하게 생각한 것이 과오였을까. 결과는 뻔했다. 나도 적잖이 실패하고 만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나의 '입방정' 때문이었다.


나의 제주 한 달 살기를 절대로 알리지 말라!

첫 1주는 상상 이상으로 편안하고 기뻤다. 정해놓지 않은 시간에 일어나 먹고 싶은 것을 먹었다. 미적거리다가 인근의 작은 책방에 가서 책 몇 권 주워 읽는 것이 일상이었다. 가까운 섬 나들이도 많이 갔다. 우도나 추자도 등 작은 섬들은 이곳에서도 교외로 놀러 가는 느낌을 내기 충분했다. 


나의 본격적인 실패는 2주 차부터였다. 주변 온갖 지인들의 방문이 이어진 까닭이다. 첫 7일 정도는, 하루하루의 시간들이 더없이 만족스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많은 기록들을 SNS에 고스란히 남겼다. '단톡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늘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던 친구들이나 선후배 간의 온갖 단체 카톡방 등에서, 자연스레 나의 제주행이 오픈되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지금껏 교류가 왕성하지 않았던 지인들에게서조차 연락이 빗발쳤다. 


1. 주말을 기해서 며칠만 거기 묵어도 되냐는 연락,

2. 다짜고짜 언제 가면 되냐고 묻는 질문,

3. 혹은 곧 갈 테니 맛집 많이 찾아놓으라는 당부(?)의 말까지, 주옥같이 쏟아져 내려왔다. 


거절했었어도 될 일이었다. 다만, 처음에 이런 연락을 모두 수락한 이유가 있다. 진짜 오랜만에 연락이 와서 내심 반가운 인물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 오랜만에 보는 거! 기왕이면 제주에서 보는 게 더 좋을 수도 있겠다!'라는 순진한 생각을 했다. 


간만에 만난 고등학교 동창 녀석은 아침마다 '오늘은 뭐해?'라 물었다. 심한 경우, 어떤 이들은 본인들의 가족을 대동하여 방문하기도 했다. 난 고작 몇 주 머물렀는데, 주변 맛집이며 관광지를 매일같이 물어왔다. 아이들을 살피느라 부모들은 물론, 나조차도 내가 구한 작업실에서 쉽게 편히 있을 수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의무감이 강력하게 작용하는 내 성격도 한몫했다. 어느 날 '오늘은 또 어떤 재미난 제주 라이프를 소개하며 그들을 만족시킬 것인가' 고민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니 자괴감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사실 한 동안은 미처 하지 못했다. 모두가 떠나고 난 뒤 텅 빈 작업실에 홀로 남았을 때. 그제야 비로소 이런 생각들이 더 진해져 왔다. 공허함이 불현듯이.


'방문 팀'이 하나였다면 모를까. 이런 수많은 연락이 빗발치다 보니, 3주 차 되어서는 스마트폰에서 SNS까지 삭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전화나 메시지는 어쩔 수 없더라도, 최대한 소통의 창구를 줄여버린 것이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사람들이 굳이 '제주행'을 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왜 또 유난히 한 달 살기는 '제주'가 많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딘가 멀리 떠나고 싶은데, 해외까진 부담스러운 경우. 여기 제주는 바다 건너 수도권에서 가장 멀찍이 자리한 섬이 아닌가. 해방감을 갈구하면서 비교적 괜찮은 대안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제주'라는 상징성이 주는 특별한 느낌도 한몫할 것이고.


나도 그런 연유에서 막연히 제주행을 택했던 거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도망쳐 온 곳이 더 깊은 늪과 같았다. 물론 그것은 온전히 내 탓이다. 벗어나고자 하는 곳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털어버리고 왔어야 할 것들을 줄줄이 단 채 제주로 왔다. 


언젠가 다시 제주살이를 하게 된다면, 그때는 이전과는 다를 것이다. 양 어깨에 지고 있던 것들을 정말 냅다 팽개쳐두고, 정말 가벼운 짐만 챙겨서 다시 와야지. 그런 생각을 한다. 


그 짐짝들이야 어차피 돌아가면 다시 어깨에 이고 가야 할 것들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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