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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해지리 Dec 05. 2022

맹자를 뛰어넘겠다는 무모한 출사표

희진이는 성실했다

 






맹자께서는 자기 자식은 가르치는 게 아니라고 하셨다.

참으로 옳은 말씀이다.

내 자식 가르치다 보면 부모 자식 간 의가 상하기 쉽다.

(난 지금도 피아노 연습하는 아이 뒤통수에 대고 무음으로 욕을 발사하는 중이다)

알지만 난 초등 남매와 집공부를 한다.


이 무모한 출사표는 수많은 희진이들로부터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교사로 매년 백여 명의 아이들을 만난다.


희진이는 5년 전 만난 아이다.

성실의 끝판왕이었다.

고등학교 입학 첫날부터 수업 시간은 기본이고 쉬는 시간도 아껴가며 공부를 하는 아이였다. 이 정도 노력이면 못할 게 없다 의심치 않았다. 내심 상위권 성적을 기대하며 첫 중간고사 성적을 확인했는데 결과는 참담했다.


공든 탑이 무너지기도 하는구나.

 

희진이는 전과목 평균이 40점대 였다. 현재 고등학교 내신은 상대평가로 과목별 등급을 산출하기 때문에 평균 점수는 의미가 없다. 다만 평균 점수로 아이의 성취도를 짐작해볼 수 있다. 각 과목별 평균이 60~70점대 임을 감안하면 희진이는 성취도는 평균 이하에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시험 범위 내용의 절반도 이해를 못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지금까지 공부한 것이 대체 어디로 간 걸까?

시간 투자로 보면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를 했던 희진이는 뭐가 문제였을까?






확인해 보니 공든 탑인 줄 알았던 희진이의 학습은 제대로 사상누각이었다.

공부하는 줄 알았는데 공부하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공부하는 행동?


책상에 앉아 책을 펴고 수업을 들었으나 학습은 되지 않는 상태다. 멍때리는 것과는 다르다. 종일 수박 겉핥기를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이다. 달콤한 수박 맛을 몰라서 겉핥기가 최선인 줄 안다.      


학교에서 수업을 듣는다. 필기를 겁나 열심히 한다. PPT 자료와 판서를 빠짐없이 옮겨 적어야 공부를 했다고 생각한다. 토씨 하나 빼먹지 않기 위해 (쓸데없는데) 몰두하느라 막상 교사의 핵심 설명은 듣지 못한다. 새로 알게 된 것, 아직 아리송한 것, 모르겠는 것을 구분하려 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이런 시도를 해보지 않아서 필요성도 모르는 아이들이 허다하다). 그저 꽉 찬 필기를 보고 열심히 공부했다고 스스로 만족한다.

 

학원에서 수업을 듣는다. 또 듣는다. 스스로 생각하는 공부를 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계속 듣기만 하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음에 만족한다. 집어넣은 수업 내용을 내 안에서 소화하고 있는지 체크하지 않는다. 들었으니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  


집에서 다시 문제집을 펼친다. 문제를 풀고 채점을 하고 해설을 읽는다. 그 와중에 동그라미 친 문제는 해설을 읽지 않는다. 찍어서 맞췄거나 아리송했던 문제여도 동그라미 치면 안다고 생각한다. 해설을 읽을 때도 대충이다. 해설은 한글로 적혀있다. 읽을 수 있다. 읽을 수 있는 걸 학습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넘어간다.


결국 하루 종일 공부를 했지만 공부하는 행동을 했을 뿐 학습이 되지 않았다.






               

진짜 OMG다


학습(學習)은 배워서 익히는 것이다.

희진이의 공부에는 익히는 과정이 없었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분해서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없었다. 수업을 들기만 하고 공부가 되었다고 생각했고, 애매하거나 모르는 걸 구분해서 완전 학습이 될 때까지 익히지 않았다. 한글이니깐 읽을 수 있었던 것인데 보고 읽은 것을 모두 공부라고 여겼다. 문제집을 많이 풀어 쌓아 올리면서 자기 만족감으로 공부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중학교까지는 이런 방법이 통할 수 있다. 워낙 시험 내용이 쉽다 보니 성실한 아이가 엄청난 시간을 들여 공부했다면 반복의 효과로 시험 성적은 좋을 수 있다. 하지만 잘못된 공부 방법이었기 때문에 꼭 배워서 익혀야 했을 개념, 어휘, 배경지식 등에 구멍이 나고 있었다.  

 

희진이의 공부 습관을 바꿔주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으나 쉽지 않았다. 나쁜 공부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희진이는 완전 학습을 이뤄가는 시간을 아까워했다. 아리송한 개념을 확실히 이해할 때까지 매달리기보다는 문제집을 많이 풀어 양을 채워야 할 것 같다며 조바심을 냈다.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당장 각 과목별 엄청난 양의 시험 범위를 공부해야 하는데 하나하나 구멍을 메꾸는 것에만 매달리면 시험 범위 공부를 다 마칠 수 없었다. 진퇴양난이었다. 하지만 워낙 남보다 많은 공부 시간을 확보하는 아이였기에 조금만 바꿔보자 설득했다. 전체 시험 범위를 처음 볼 때는 기존대로 공부하되 문제집을 여러 권 풀기보다 한 권을 완전학습이 되도록 제대로 반복적으로 공부하길 권했다. 그러나 마음이 급해진 희진이는 얼마 못가 기존 방법대로 양치기 공부를 했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 1년을 마쳤다.


(사실 아이에게 방학마다 간곡히 요청했다. 방학은 진도의 압박이 없으니 혼자 공부할 때 완전학습을 위해 노력해보자고. 영어문법을 공부하더라도 어려운 교재보다 60~70% 정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선택해서 100% 이해가 될 때까지 매달려 공부해보자 제안했다. 순둥이였던 희진이는 알겠다고 긍정 메시지를 남기고 다시 학원 수업에 치여서 자기 공부는 하지 못하고 남얘기만 잔뜩 듣기만 하고 성과 없이 돌아오곤 했다.)



 


 





희진이는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간호사가 되고 싶어 했던 아이는 전문대 간호학과에 진학했고 병원 실습도 마치고 이제 졸업을 앞두고 있다. 종종 소식을 전해오는 희진에게 늘 응원의 말을 남긴다.


"너의 성실함과 따듯함이라면 어떤 것도 해내지 못할 것이 없을 거다. 늘 응원한다. "


그러면서 한편 생각해본다.

희진이가 만약 잘못된 공부 습관이 없이 성실함과 대단한 공부량으로 고등학교 생활을 했다면 어땠을까?



 




여전히 많은 희진이들을 만난다.

노력의 경중은 다르지만 공부하는 행동을 하면서 공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안타까운 아이들이 한 트럭이다. 잘못된 방법으로 공부하면서 원하는 성취를 이루지 못하면 난 해도 안 되는 아이라며 좌절하기를 반복한다. 희진이처럼 아이들의 공부 습관을 고쳐주고자 수없이 상담하며 공을 들이지만 바뀌는 아이들은 백에 한두 명 정도다.


그러다 생각했다.

우리집 남매는 희진이가 되지 않도록 해야겠다.

고등학생이 되어 본인이 노력하는 만큼 성과를 얻을 수 있는 아이가 되도록 도와줘야겠다.


맹자께서 하신 말씀을 거스르고 난 내 아이들과 제대로 된 공부를 위해 집공부를 한다.

무모해 보이는 도전을 한 지 4년이 흘러가고 있다.  


참고로 다행히 아직 남매와 의 상하지 않고 행복하다 (아들 입장은 확인된 바 없다)





(사진출처:픽사베이)

(희진이는 가명임을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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