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스테판츠민다 입니다

아스라이 게르게티 츠민다 사메바 성당을 봅니다

by 행복해지리

1. 비행기에서 내게 토한 그놈

2. 조지아 시작이 좋지 않다

3. 엎어진 김에 쉬어가자

4. 스테판츠민다(카즈베기) 룸스 호텔 가성비에 대하여

5. 누군가 침입했다

6. 지금 여기, 스테판츠민다 입니다






난 해외여행 경험이 많지 않다. 여행자를 위한 도시 홍콩과 리조트 안에서만 놀다 오는 패키지 여행이 전부인 나는 모험적인 여행을 떠날 성격이 못된다. 가이드 없이 첩첩산중 캅카스 산맥 한가운데 스테판츠민다까지 오게 된 건 순전히 함께해 준 일행들이 이끌어주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새로운 하루였다.



성삼위일체(게르게티 츠민다 사메바) 성당


(이미지출처 : 조지아 나무위키)



사진으로 본 게르게티 성당은 판타지 영화 한 장면 같았다. 대단한 카즈베기산을 배경으로 깔고 2000m가 넘는 봉우리에 자리한 이 14세기 건물은 크기는 작지만 이 산맥의 주인 같은 당당함이 느껴진다. 스테판츠민다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이 성당을 방문하는 게 목적일 거다. 마을에서 성당까지 가는 방법은 2시간 정도 걸어가거나, 또는 SUV 택시를 타는 것이다.

뚜벅뚜벅 걷다가 저 멀리 게르게티 성당이 실제로 내 눈앞에 보이면 얼마나 근사할까 상상하며 이곳에 왔다. 눈은 계산에 없었다. 내가 북반구가 겨울인 1월에 최고봉이 5600m에 달하는 캅카스 산맥에 간다는 걸 염두하지 않았다. 갈 수 있을까?

룸스 호텔을 조금 벗어나 저 멀리 산 정상에 게르게티 성당이 보인다. 있으나 갈 수는 없었다.
이런 차림으로 눈 덮인 산을 오를 수는 없었다


호텔에 부탁해 차량을 섭외해보려 했으나 눈이 많이 내려 차량은 접근이 안된다는 답변을 들었다. 눈길을 헤치고 갈수 있도록 준비된 게 없지만 쉽게 포기하지 못하고 무작정 지도에서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나갔다. 호텔을 벗어나니 눈 덮인 산 봉우리에 성당이 보인다. 그리고 한참을 가다 성당에서 내려오는 러시아 관광객을 만났다.


갈만해요? 얼마나 걸렸어요?
왕복 4시간쯤 걸렸는데... 가지 마


우리를 훑어보더니 그런 차림으로는 못 간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들은 눈밭에 최적화된 털부츠와 내 정강이까지 쌓인 눈 정도는 우스워보일 기럭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아쉽지만 게르게티 성당은 먼발치에서 아스라이 바라보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트빌리시 까르푸 매장에서 게르게티 성당 사진이 박힌 부직포 장바구니를 구입했다. 지금은 우리 집 종이가방 보관함으로 쓰인다.







프로메테우스를 만나러 가자.


게르게티 성당은 포기하고 프로메테우스에게 발길을 돌렸다. 제우스에게 불을 훔쳐 인간에게 내어주고 날마다 독수리에게 간을 쪼여 먹이는 형벌을 받게 된 프로메테우스가 묶여있었던 곳이 바로 캅카스 바위다. 캅카스 산맥의 한가운데에 있는 스테판츠민다에서 프로메테우스를 볼 수 있다고 해서 갔는데 기대가 너무 컸나 보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들판에 한쪽 나무에는 독수리가, 반대편에는 프로메테우스로 추정되는 페인트 칠이 있을 뿐이다. 애들 장난처럼 표현된 모형이 아쉽지만 아직은 여느 관광도시처럼 세련되지 않은 것이 스테판츠민다의 매력이기도 했다.



기대가 크면 실망하기 마련이지만, 이건 좀 너무했다.
죄송한데 저 사진 좀 찍게 자리 좀 비켜주시겠소?






날이 추워서 인지 사람보다 소를 더 많이 만났다. 이 소들은 사람을 봐도 긴장하지 않고 자기 갈 길을 간다. 딱히 뜯어먹을 풀도 없는데 무리 지어 어슬렁거리는 것이 마실 나온 어르신 같다. 낯선 동양인이 신기하다는 듯 사진 찍을 때 우리를 응시하기도 한다. 얘들은 어디 살고 나중에 어떻게 집을 찾아가나 궁금했는데 나중에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답을 알 수 있었다. 익숙하다는 듯 골목길로 들어선 소 한마디가 대문 앞에 가서 소기척을 하니 집안에서 주인이 나와 문을 열어주더라. 알아서 집으로 돌아올 거라는 믿음이 바탕이 된 자유분방한 방목시스템이 신기방기했다.



사람보다 소를 더 많이 만난 거 같은 이곳은 스테판츠민다입니다
눈길이 익숙한 듯 소들은 미끄러지지 않더라
길 좀 물어봐도 될까요? (왠지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저랑 같이 사진 찍으실래요?
거기서 뭐 하소? 단체 사진을 찍으려다 소가 배경이 되어주어 내가 찍혔다.









특별한 정보 없이 구글 지도에 의지해서 움직이다가 스테판츠민다 역사박물관이 있다고 해서 가봤으나 문이 닫혀있었다. 대신 바로 옆 마을 정교회에 가본다. 차차 실감하게 될 테지만 조지아 인들의 신앙심은 종교가 없는 나에게도 경건함이 전해진다. 마침 마을 분께서 기도를 마치고 나오셔서 비어있는 예배당을 볼 수 있었다. 신성한 공간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내부를 살펴봤다. 크기는 작지만 오랜 시간의 내공이 느껴졌다. 이곳 성당을 방문할 때 여성은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는 것이 예의라 하여 급한 대로 소지하고 있던 스카프를 두르고 입장했다. 트빌리시 등 제법 큰 성당에서는 관광객을 위해 스카프가 입구에 비치된 곳이 많았다.



გაბრიელ მთავარანგელოზის ეკლესია 이름은 도당췌 읽을 수가 없지만 매력 넘치는 조지아 글자
금방 나가신 마을분은 무엇을 기도하셨을까
여기는 스테판츠민다입니다






스테판츠민다라는 원래 이름보다 더 많이 알려진 카즈베리라는 이름은 러시아 영향력 아래 있을 때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분들에게 길을 묻으면서 '카즈베기'라는 명칭을 썼더니 즉각 '스테판츠민다'라고 정정해 주셨다. 러시아에 대한 이들의 감정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그래도 마을에서 북쪽으로 10여 km만 가면 러시아 국경인 지역이라 여전히 러시아와 교류가 활발한 지역이다. 관광객도 상당수가 러시아 사람이었고 식료품 가게에서도 러시아어를 쉽게 볼 수 있었다. 그 와중에 러시아에서 인기 있다는 우리나라 컵라면 '도시락'을 만나니 여간 반갑다. 저녁으로 맛보기 위해 바로 집어 들었다.



한겨울 산중에서 정갈하게 진열된 오색의 신선한 과채들. Ska Market.
캅카스 산맥 산 중에서 선명하게 '도시락'이라는 한글을 보니 세상 반갑다
주민들의 주식이 되어주는 빵 진열대. 무심하게 꼿혀 있는게 재미있다.







조지아 화폐는 라리(GEL)는 우리 돈으로 약 400원 정도에 해당된다 (1라리는 100 테트리(tetri)) 수도 트빌리시에서는 물가는 많이 저렴하다 느끼기 어려웠지만 이곳 스테판츠민다에서는 쉽게 지갑이 열렸다. 갓 구운 빵을 파는 가게를 기웃거려보니 직접 만든 빵이 1라리도 안 하는 90 테트리(tetri). 고소하고 담백한 두툼한 난 같은 빵을 이날 우리 저녁을 위해 구입했다.




얼굴보다 훨씬 큰 빵 가격이 우리 돈 400원 정도
고소하고 담백한 빵이 우리돈 400원 정도


마을을 어슬렁 거리다가 출출해진 배를 채울 겸 들어간 파노라마 카즈베기에서는 시원한 하우스 맥주와 치즈스틱을 우리 돈 1만 2천 원 정도로 즐겼다. 눈앞에 병풍처럼 펼쳐진 카즈베기산은 덤으로 따라온다. 눈 때문인지 크리스마스임에도 가게는 한산했고 얼마 안되는 돈으로 이 넓은 공간과 여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Restaurant Panorama Kazbegi
이곳에서는 흔하지 않은 동양여자라서였을까. 우리가 스페셜하다며 치즈스틱에 덤을 얻어주었다.
파노라마라는 이름답게 전면 유리창 너머 카즈베기산이 담긴다.





스테판츠민다는 내 마음속 동화책처럼 저장되어 있다.

언제 꺼내봐도 그날들이 환상 같고 꿈결 같다.

푸른 카즈베기산을 보러 다시 찾아오겠다는 다짐 했는데 그날이 오려나 모르겠다.


내일은 이곳을 떠나 트빌리시로 간다.

험난할테니 오늘 밤은 푹 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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