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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종 Dec 13. 2021





 여름이라는 섬(Leave Me in Summer)



 34. 땀



 마을버스 창밖으로 빗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의자에 앉은 채 캐리어 틈으로 손을 집어넣어 우산을 찾았지만 잡히는 게 없었다.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슬쩍 바닥에 캐리어를 눕히고 지퍼를 끝까지 잡아당겼지만 그래도 우산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호텔에 두고 온 걸지도 모른다. 그녀의 집으로 갈 때는 비가 내린 적이 없었다.

 빗줄기처럼 쏟아지던 달빛과 흰 바다, 암석 위에 쪼그리고 앉은 그녀의 모습. 나는 또 그 해안가를 걷고 있었다. 고개를 저어 그 풍경을 머리에서 떨쳐냈다. 캐리어를 닫고 지퍼를 잠갔다. 그녀의 바지를 벗기며 나는 단추를 풀어야 했다. 지퍼였다면 더 쉬웠을 텐데. 그놈의 단추가 잘 풀리지 않아 물 흐르듯 이어지지 못하고 끙끙거려야 했다. 포기하고 다시 그녀에 대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나는 이미 그녀의 몸을 만지고 있었다.

 정류장에 내려 오피스텔로 오는 길에 빗줄기는 더욱 거세졌다. 방울이 줄기가 되고 점이 면이 되어 머리와 어깨를 적셨다. 이해할 수 없는 변덕스러운 날씨였다. 너무 더운 나머지 빗방울은 금세 습기로 변해 살갗을 적셨다. 조금만 더 가면 내 방이었다. 나는 쉬지 않고 걸었다. 캐리어의 바퀴가 웅덩이를 지나며 물살을 가르는 소리가 들린다. 잠시 멈추어 그 파문의 움직임을 보다 고개를 돌린다. 비를 맞는 게 기분을 나아지게 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이상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건물 입구로 들어갔다. 다행히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중에는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주말 오전의 오피스텔은 조용했다. 다들 방 안에서 어제의 숙취를 해소하거나 주중에 자지 못한 잠을 몰아 자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신경질적인 사람이 괜히 부산을 떨며 아침부터 분리수거를 하거나 마트에 간다며 소란스레 하루를 시작한다거나. 하지만 오늘의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얼른 침대에 눕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서둘러 이 여행을 마무리 짓고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삶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나를 우울하게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문을 열었다. 이곳이 내 집이다. 이곳이 내 집일까.

 이미 방안은 습기로 가득했다. 어느새 그친 하늘의 한 틈으로 햇빛이 새어 나왔다. 밖에 있을 때만 비가 오더니 막상 들어오자마자 구름은 거짓말처럼 개여 버렸다. 매번 날씨란 이런 식이었다. 투덜거리며 방바닥에 캐리어를 펼쳤다. 빨랫감들을 골라 바구니에 넣는다. 세면도구는 화장실 선반과 책상 위에 올리고 나머지 안대나 충전기는 원래 있던 자리인 베개맡에 놓는다.

 에어컨은 꺼져 있었다. 침대에 놓인 리모컨을 쥐고 제습을 켰다. 돌아가는 실외기가 집에 왔음을 알려주었다. 몸에 달라붙은 옷들을 간신히 한 올씩 떼어내 방 한쪽에 모아두었다. 녀석들은 손빨래를 해야 한다. 옷이 상하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익숙한 삶으로 돌아와 집안일을 처리하다 보니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시 원래의 생활로 돌아온 것이다.

 화장실 거울 속에는 어딘가 허전해 보이는 내 몸이 있었다. 그 몸은 어제까지만 해도 누군가의 것이었다. 그녀는 마치 자기 것처럼 내 몸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몸으로 데워지고 손길로 달아오르던 배와 허벅지, 가슴이었다. 샤워기의 꼭지를 돌리자 바로 찬물이 쏟아지는 바람에 재빨리 몸을 틀어 피해야 했다.

 “어우, 씨.”

 샤워 부스 속으로 조금씩 증기가 차오르기 시작한다. 땀방울이 맺힌 몸에서 핀 증기인지 샤워기에서 쏟아진 물에서 솟은 증기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뺨을 흐르는 물방울은 땀일까 빗물일까 아니면 샤워기에서 쏟아진 물줄기일까. 마침내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흐린 주변으로 그녀의 얼굴이 그려졌다. 내가 알아본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 지금쯤 친구와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으리라. 어제 그녀에게 카페의 주소를 알려줬으니 내게 연락이 왔었다 해도 그녀의 여행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손가락으로 그녀의 감촉이 느껴졌다. 나는 그녀의 몸을 알았다. 하지만 그 몸은 이제 내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녀를 책임질 수 없었다. 그런 삶을 살도록 도와줄 수도 없었다. 눈앞의 일들만 헤쳐왔기에 그녀가 해오던 고민 같은 건 내 삶에 들어올 여지가 없었다. 그녀의 문제는 정말 배부른 고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도 조금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누군가를 필요로 했고 우연히 내가 그 역할을 해준 것뿐이다. 우리는 서로를 만나게 될 줄 몰랐고 특별한 약속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 섬에서 만난 우리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나는 그녀를 얻었는데 이제는 잃어버렸다. 나는 원래 그녀를 몰랐는데 이제는 알아 버렸다. 그게 내 현재여서 나를 아프게 했다. 나는 혼자였다. 그녀를 만났기에 나는 혼자가 되어버렸다. 쏟아지는 물줄기 사이로 나지막한 흐느낌이 겹쳐 들렸다. 밤에 들은 그녀의 울음일지도 모른다.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그녀가 내던 울음소리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해안의 끝에 이르기 전 그녀 혼자 몰래 바다에 섞던 소리일지도 모른다. 더는 어디로도 숨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처음 보던 때처럼 나는 내 마음을 알고 있었다. 다만, 나이가 들었을 뿐이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아마 땀일 것이다. 이것은 비도 물줄기도 아닌 땀이리라. 몸에서 흐른 땀이 증기로 올라와 샤워 부스를 가득 메운 것이다. 정답을 찾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눈가를 물줄기로 씻어 내렸다. 너무 좋았다. 그녀의 몸은 아름다웠고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즐거워할 때는 나도 그곳으로 함께 가고 싶었다. 그녀의 혀가 나를 핥아 내릴 때 나 역시 잠깐씩 나를 잊고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우리는 그곳에 있었지만 그곳에 없기도 했다. 그녀가 떠나는 모습을 보아서 다행이었다. 나마저 즐거움의 끝에 이르렀다면 그녀가 지은 그 표정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눈을 감은 그녀의 얼굴을 나는 잊을 수 없으리라.

 이번에는 그녀의 번호를 지운 걸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로 마음먹었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물소리가 귓등을 울린다. 어디론가 나를 밀어내는 물소리가 들린다. 그녀를 안아주지 못한 폭포로 가는 길이 떠오른다. 그것만큼은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지만 그때 그녀를 안아주지는 못했다. 우리는 사랑했지만 서로를 깊이 안아줄 수는 없었다. 그 생각에 이르자 나는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달려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쥐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여름이라는 섬(Leave Me in Summe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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