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세종 Dec 03. 2021

한 가닥





 여름이라는 섬(Leave Me in Summer)



 30. 한 가닥



 그녀가 보던 달이 차오르고 있었다. 방안에 쏟긴 달빛이 파도처럼 흘러와 침대와 이불을 적셨다. 며칠 전만 해도 나는 거칠 것이 없었는데 오늘은 이 방에 홀로 누워있다. 그녀도 나와 같으리라. 그녀도 혼자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 섬에서 찾고 싶은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아까처럼 등을 기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것이든 내가 바라는 그녀의 모습을 그렸다. 그녀의 귓가, 코끝, 입술과 목 언저리, 어딘가에 있을 가슴과 그 아래로 달빛은 쏟아지는데 나는 이 방에 갇혀 가만히 기울어가고 있었다. 무엇을 찾으러 이곳에 왔는지 알 길이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려주는 이도 없었다. 마음을 따라 이곳에 왔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여기 머물렀다. 몸이 지배하는 삶은 울적했다. 습관은 나를 괴롭게 할 뿐이다. 나도 그녀처럼 익숙한 삶을 거부한 걸까. 생활에 매몰되려 하지 않았는데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하잘것없는 욕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호텔에 갇힌 나와 그녀의 집에 갇힌 그녀를 생각했다. 우리는 침울한 우리 속 짐승처럼 앉은자리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달의 창살 밖은 인기척이 없었다. 우리를 가둔 사람은 우리 자신일지도 모른다.

 어디로든 가야 한다. 하지만 어디로도 갈 곳이 없었다.

 어디로든 가야 한다. 하지만 어디로 갈 것인가.

 창밖으로 건너편 방이 보였다. 사방을 커튼으로 가린 그 방은 불이 꺼져 있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침대에서 일어났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조용한 복도에 자명종처럼 울려 퍼졌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이미 죄를 지은 사람처럼 두려웠다. 자정을 넘은 시간이었기에 로비의 불만 환하게 켜져 있었다. 조심스레 걸어 그곳을 지나쳤다. 투숙객이 가득 찬 호텔의 데스크는 오히려 따분해 보였다. 앞머리만 보이는 걸 보니 직원은 의자에 앉아 쉬는 듯했다.

 다시 그 복도에 접어들었다. 내게 우울과 불쾌를 가져다준 그 자리를 지나쳤다. 두 번째 창문도, 세 번째 창문도, 네 번째 창문도 지나쳤다. 마지막 창가에 이르러서야 나는 다시 그곳에 앉아 보았다.

 밝은 밤이었다. 달이 너무 환해서 밤이라 부르기도 어색한 남빛의 풍경이 펼쳐졌다. 무언가 그날과는 달랐다. 그날보다도 부드럽고 차분하며 안정된 느낌이 들었다. 달라진 건 사람들이었다. 그날과 달리 지금의 풍경에서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풍경에서 사람들이 사라지자 그건 더 이상 남의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 풍경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었다. 그건 내 것도 아니었다.

 아무도 없는 순간의 수영장과 그 뒤의 나무 몇 그루는 나의 시선과 창밖의 내 존재까지 받아들여 한데 고요한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누군가 있을 때의 그 모습은 나를 쓸쓸하게 만들고 외롭게 했는데, 사람들이 사라지고 나자 나는 내 감정에서 벗어나 그곳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 풍경에 숨은 나를 알아보게 되었다. 나와 서혜를 보던 성현이가, 내 말을 듣고서 꽃을 알아챈 성현이가 풍경 밖 사람이 아니라 풍경 속 인물인 것을 알았다. 비로소 나는 이 수영장을 처음으로 보는 듯했다. 그곳은 누군가의 빈자리이기도 하고 어느 누구의 자리도 아닌 그것 자체이기도 했다. 나는 그곳을 바라봄으로써 그곳의 일부가 되었고 나와 수영장은 한 사람의 시선 없이는 어느 것도 홀로 존재할 수 없었다. 마치 그날 밤 올려다보던 하늘과 달처럼 우리는 서로 없이는 각자의 마음도 알아차릴 수 없었다. 내가 없었다면 그날의 두 사람도 없을 것이다. 성현이가 없었다면 내가 서혜를 그리워했을까. 서혜가 없었더라면 내가 성현이와 잘 수 있었을까. 우리 중 누구도 그 추억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마침내 이 풍경을 만든 호텔 주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는 관음증을 가진 변태이거나 우울증 환자일 수도 있지만 추억과 타인, 그들로 인해 비추어진 내 존재를 깨닫게 한 유능한 사진사이기도 했다. 새로이 알게 된 것에서 오는 흥분이 사라지자 내가 이곳에 온 까닭이 다시 떠올랐다.

 어디로 가야 할까. 어디로든 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복도를 따라 걸었다. 나를 보던 그 방으로, 나를 신경 쓰이게 만들던 그 방으로. 네 귀퉁이에 꼭 맞게 커튼을 쳐 아무도 안을 볼 수 없게 만든 그 방 앞에 섰다. 문을 두드리려다 슬쩍 손잡이를 당겨 보았다. 그곳은 잠겨 있지 않았다. 조금씩 손잡이를 돌렸지만 잠금장치가 된 문 특유의 철컥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신 스프링이 날아간 듯한 탄력 없는 쇳소리만 삐걱거리며 복도를 울렸다.

 그 방은 비어있었다. 화장실이 있을 자리에는 바닥에서 솟아난 수도관이, 침대가 있을 곳에는 매트리스가 사라진 받침대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먼지가 쌓인 바닥은 오랫동안 청소하지 않은 듯했다. 문을 닫았지만 역시 고장 난 문은 제대로 잠기지 않았다. 복도의 불빛을 벗어난 눈이 다시 어둠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선반이 있어야 할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텔레비전이 있어야 할 곳에는 벽에서 튀어나온 전선뿐이었다. 새로 단장하려 치워둔 방처럼 그곳은 황폐했다. 나는 방 가운데를 가로질러 유리창 앞에 섰다. 그리고 커튼을 걷었다.

 달빛과 하늘과 수영장, 숨 막힐 듯이 들어선 객실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내 방을 제외한 나머지 방들은 모두 커튼을 닫고 있었다. 오로지 내 방만이 커튼을 걷고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고 있었다. 비스듬히 꺾인 달빛이 흘러넘치는 방 하나가 보인다. 그곳은 누군가 커튼을 걷었기에 훤히 안을 볼 수 있었다. 침대 맞은편에 놓은 텔레비전이, 텔레비전 옆에 선 작은 선반이, 방 한쪽에 열린 캐리어의 바퀴가, 그 위로 대충 펼쳐진 바지와 속옷들이, 그리고 닫힌 현관문이 있을 어둠까지도.

 바닥에 주저앉아 그곳을 바라보았다. 이 섬에서 사흘을 보낸 나의 흔적을 살폈다. 아마 달은 내 뒤에 떴는지 이곳은 비추지 않고 저곳만 비추었다. 수영장의 물도 이쪽은 어둡고 저쪽만이 밝았다. 여기에 남겨진 건 어둠이었고 저기에 주어진 건 빛이었다. 하염없이 내가 있던 방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떠올렸다. 아직 커튼 뒤에 숨었을 그녀의 모습을 그렸다. 벗은 그녀의 가슴 위로 펼쳐진 달빛처럼 나도 그녀의 몸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내게 필요한 건 달이나 바다가 아니었다. 침묵이나 안식은 죽은 사람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나는 한 여자의 몸을 원했다. 그것은 내게 주어져야 마땅했다. 내가 받아 든 선택지는 과거와 같은 삶을 살지가 아니었다. 내 앞에 놓인 질문은 한 사람을 가질지 말지였다.

 눈앞의 문제를 풀어야 한다. 오 년 전 그들이나 오늘이 지난 뒤 우리의 미래는 지금 내가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니다. 그것은 답 없는 추억으로 남거나 누군가의 결단이 필요한 선택지로 남게 될 뿐이다.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기 전에는 우리에게 없는 일이었다. 존재하지 않는 일은 아무리 시간을 들여도 해결할 수 없었다.

 그녀의 아픔이 안타까웠다. 그녀가 고통스러워하는 문제들은 그녀가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들은 사실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다. 이 섬에서 몇 년을 지나 보낸 들 그녀는 자기가 품은 질문들에 하나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달, 바다, 암석 지대. 그런 것들은 한 컷의 사진으로 남기고 잊혀야 할 것이었다. 없는 문제를 해결할 능력은 우리 중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아직 우리가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문을 닫고 방을 나섰다. 걸어온 길을 되짚어 내 방으로 돌아왔다. 커튼이 걷힌 유리창으로 방금 다녀온 건너편 방이 보였다. 다시 커튼으로 감추어졌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다는 걸 알았다. 그 방은 내 시선을 피하고 나를 감시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누구도 살지 않는 빈방이었다. 우리를 살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시선 비슷한 것조차도 모두 내게서 나온 것뿐이다.

 당장 그녀의 집으로 찾아가 커튼을 걷어도 그녀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 햇빛은 그녀를 아프게 하지 않았다. 나와 함께 식사하며 그녀는 환한 전등 아래 오랜 시간을 서 있지 않았나. 마땅히 고통스러워야 할 시간을 보내면서도 그녀는 아파하지 않았다. 그저 나와 함께 밥을 먹었을 뿐이다. 우리가 차린 식탁에 앉아 그녀는 한 끼를 마쳤다. 그보다 대단한 것이 우리 사이에 필요했을까. 나는 왜 그 집을 나왔을까. 그녀가 부끄럽다고 했을 때 그 자리에 남아 있을 걸 그랬다. 투정하는 아이처럼 그녀의 집을 나온 게 후회되었다. 그곳이 내 집이었다. 그녀와 한 공간에 있는 게 내게는 집에 온 것처럼 편안하게 느껴진 것이다.

 비로소 이유 묻기를 그만두었다. 조금 더 있으면 해가 뜰 시간이었다. 생각이 많은 날이면 오늘처럼 잠들지 못하곤 했다. 그녀도 아직은 깨어 있으리라. 달빛이 사라지고 창밖에서 새소리가 들려올 때쯤 그녀는 시체처럼 잠들리라. 그런 그녀의 곁에 나는 눕고 싶었다. 섹스가 아니라 정말 한잠을 자고 싶었다. 숨이 멎은 사람처럼 조용히 그녀의 곁에 눕고 싶었다. 그녀의 손이 내 손에 닿는다. 그녀의 팔이 내 팔을 스친다. 그녀의 숨소리가 귓가에 머문다. 새근거리며 잠든 그녀의 숨결이 입술과 코끝으로 새어 나온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잠든다. 그 호흡을 맡으며 꿈꾼다.

 주차장으로 나와 시동을 걸었다. 보통 사람에게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지만 꼬박 밤을 새우고 이제 막 잠들려는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그녀와 내 삶은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저들이 활발할 시간에 우리는 잠들고 저들이 쉴 시간에 우리는 깨어난다. 슈퍼 히어로라도 된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어서 달려가 그녀에게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 그녀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잘못된 것도 아니라고. 깊은 상실과 좌절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울부짖던 그 순간 나는 그녀가 가진 힘을 보았다. 때로는 분노가 사람을 일으키는 것처럼 그녀의 우울은 그녀를 일종의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게끔 하고 있었다. 그 메커니즘은 항공기나 자동차 같은 것이어서 내가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힘이 그녀를 계속해서 살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으로도 우리에게는 충분하리라. 그녀는 그 힘을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것이 그녀에게 주는 메시지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병든 사람이 아니라 조금 다른 상황에 놓인 것뿐이다. 그것은 어제까지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동시에 앞으로 나아갈 삶의 방향을 고민할 기회를 주기도 했다. 아파야 병원을 찾는 것처럼 그녀와 내가 이 섬에 찾아온 데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아직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저 방과 내 방처럼 우리는 서로의 자리를 바꿈으로써 서로가 가지고 온 삶의 문제들을 해결할 방법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다시 나는 희망의 실마리를 쥐었다. 엉키고 성긴 그 실타래에서 간신히 삐져나온 한 가닥을 찾았다. 그것은 너무나 가늘고 위태로워서 심지어 그걸 발견해낸 나 자신조차 애처롭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자기의 눈에 보인 단 한 올의 희망도 붙잡지 못하는 인간이야말로 불행한 존재다. 수평선의 끝으로 보이는 검은 점을 향해 온 생애를 걸어 노를 젓던 주인공들처럼 그녀와 나도 그래야 했다. 한 가닥 희망에 자기의 삶을 걸지 못하는 인간은 불행하다. 불안과 회의, 자기비판에 익숙해져 내 안의 힘을 꺾어온 채 우리를 여기까지 이끌어온 것이다. 내게는 아직 힘이 남아 있었고 그녀는 이미 자포자기한 채 바다를 표류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구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기에는 그녀를 너무 많이 알아 버렸고, 나를 그렇게 만든 그녀의 솔직함이 다시 미웠다. 또 하나의 추억으로 그녀를 내팽개칠 수는 없었다. 아름다운 추억은 이미 내 삶에 충분했다. 나는 현재를 만들고 싶었다. 단단한 추억의 성채를 쌓기보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운 현재의 지붕을 들어 올리고 싶었다. 허름할수록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많아질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바라던 걸 얻게 될지도 모른다. 쉽게 권태로워지는 세상에 대한 의문과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삶을 향한 낙담. 어쩌면 이곳에서 나는 희망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침묵하는 바다 위 순풍에 돛을 올린 배처럼 나는 떠도는 그녀의 뒤를 쫓는다. 아직 여행은 끝나지 않았고 나는 더 가야만 한다.








 다음에서 계속

이전 13화 부끄러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