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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종 Mar 14. 2022

어떤 연락





 사랑한다는 말(A Word)



 2. 어떤 연락



 “남 대리님, 기안서는 언제쯤 올릴 거예요?”

 “아직이요. 원래도 이렇게 일찍 하는 게 아니었잖아요. 왜 갑자기 일정이 촉박해진 거죠?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굉장히 여유로웠던 것 같은데.”

 “우리는 다들 바빴어요. 남 대리님만 여유로워서 일을 다 해놓고 노시는 줄 알았지. 이제 보니까 사람이 영 엉망이네.”

 “엉망이라니요? 지금 무슨 말씀을. 당장 사과 안 하시면 감사팀에 이르겠습니다. 아니, 보고하겠습니다.”

 “이르겠다니, 고자질쟁이 같으니라고.”

 “먼저 엉망이라고 하셨잖아요. 아무튼 저는 좀 바빠서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시죠. 어떤 징계가 내려질지 참 궁금하네요.”

 “두 사람이 아웅다웅하는 모습을 보면 나는 참 기분이 좋아. 이런 거라도 없으면 어떻게 회사생활을 하겠어.”

 “빈 입으로만 말씀하시지 마시고 커피라도 한 잔씩 사주시죠.”

 강 차장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대답을 안 해주시네.”

 옆에서 나를 갈구던 조 대리가 낄낄거리며 웃고 있었다.

 “섭섭합니다 차장님.”

 “나는 곧 보고 들어갈 게 있어서.”

 책상 한쪽에 놓인 서류뭉치를 집어 들더니 강 차장은 급히 본부장실이 있는 복도로 사라져버렸다. 옆에서 나를 쪼아대는 조 대리의 장난에 분위기를 맞추어 가며 농담을 이어가던 순간이었다. 휴대폰 진동음이 울려 무심코 쳐다본 액정 화면에는 낯익은 사람의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이지혜.’

 잠시나마 내가 잘못 보았다고 생각했다. 벌써 그녀와 헤어진 지 사 년이 지난 때였다. 이제 와 우리 사이에 주고받을 것은 없으리라. 축의금을 받으려고 연락한 것은 아닐 테고, 다시 만나고 싶어서 연락했을 리도 없었다. 설마 그런 건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진동이 멈추었다. 뒤이어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오랜만이네. 잘 지내지? 시간 나면 전화 한 통 부탁해.’

 잠시 내용을 비추던 액정 화면은 금세 불이 나가 까맣게 변해버렸다. 옆에서 조 대리가 계속해서 장난을 치고 있었지만 이미 내 신경은 휴대폰에만 쏠려 있었다.

 주변 동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건물 옥상으로 올라왔다. 남들의 눈을 피해서 몰래 담배를 피우던 다른 사무실의 직원들이 문이 열릴 때마다 깜짝 놀라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 우스운 광경을 지나쳐 옥상의 끝으로 향했다.

 ‘부재중 전화 1통.’

 전화를 걸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여졌다. 그녀에게 다시 연락을 한다고 해서 아름이에게 죄를 짓는 것은 아니었다. 부도덕한 행동을 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왜 자꾸만 잘못하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걸까. 그녀의 연락을 무시할까도 생각해보았다. 그녀의 연락을 씹기 위해서 우리 사이에 있었던 안 좋은 일들을 떠올리려고 노력했지만 어느새 흘러가 버린 긴 시간은 기억하기에 좋은 일만 남기고 아프거나 힘든 것들은 모두 지워낸 뒤였다.

 그때의 나는 어렸고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내게는 첫 연애였지만 그녀에게는 두 번째나 세 번째였던 것 같다. 내 곁에 누운 그녀의 몸이 떠올랐다. 몸정이 제일 질기다 말하는 그녀에게 나는 그런 이야기 좀 하지 말라며 다그쳤었다. 지나고 나니 그 말이 맞기는 했다. 서로의 감각을 공유한 경험은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았다. 그것은 몸이 기억하는 것이기에 마음과는 달리 지울 수 없는 것이다.

 지금 내가 반드시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 손은 이미 부재중 통화 목록을 누르고 있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네가 먼저 전화했으니 나도 연락한 거라고 해야 하나. 무슨 일인지 용건부터 물어야 하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연결음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바로 전화를 받지 않았다. 통화 목록을 살폈지만 전화가 끊기자마자 십 분 만에 다시 건 연락이었다. 그녀가 못 받을 이유가 없었다. 나를 가지고 노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 이내 기분이 나빠졌다. 전화만 달라고 한 걸로 봐서는 급한 일은 아닌 듯했다. 신경을 쓰지 않기로 마음먹고 옥상에서 내려가려는 순간 다시 진동음이 울렸다. 그녀의 이름이 뜨자마자 바로 전화를 받았다.

 “오랜만이네.”

 의례적인 인사도 없이 반가움부터 표시하는 그녀의 태도에 나는 당황해버렸다.

 “당연히 오랜만이지. 몇 년이나 지난 거야.”

 “글쎄, 삼 년 좀 넘었지 아마?”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다 지금의 여운을 조금이나마 더 느끼고 싶어서 그 말을 뒤로 미루었다. 그녀를 아쉬워하는 것은 아니리라. 이것은 그저 오래된 친숙함에 잠시 젖어든 것뿐이다. 오래 입다 보니 엉덩이와 허벅지의 굵기에 맞춰진 바지를 입는 것처럼 편안했다. 그녀와 헤어진 이유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떻게 지내? 뭐하고 살아.”

 “너도 내 근황이 궁금하긴 한가보다.”

 “시간이 그렇게 지났는데 이제 와 뭘 더 하겠어. 나는 기억도 잘 안 나.”

 “다행이네. 나는 조금 걱정했거든. 너무 갑작스레 연락한 건 아닌지, 괜히 연락했다가 어색한 분위기만 만드는 것은 아닌지 해서 말이야.”

 “어색하긴 해.”

 건너편 빌딩을 보며 웃는 동안 수화기 너머의 그녀도 짧은 웃음소리를 들려주었다. 우리는 아직 서로의 생활을 건드리지 않았기에 무슨 이야기든 자유롭게 나눌 수 있었다. 내가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것을 그녀에게 말해야 할까.

 잠자코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오랜만에 너에게 연락한 건 너를 한번 보고 싶어서야.”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이 마음이 어느 감정에서 시작한 것인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설렘일까 불안일까. 아름이에게 알려주어서는 안 된다. 한참을 대답하지 않았지만 수화기 너머의 그녀는 나를 재촉하지 않았다.

 “불편하면 안 보아도 괜찮아. 대신 하고 싶은 말은 메시지로 남겨둘게.”

 “언제가 괜찮아?”

 전화가 끊길 것이 두려워서 그녀의 말을 잘랐다. 나도 그녀가 보고 싶었다. 내게는 첫사랑이었다. 부끄러운 스무 살의 첫 경험이었다. 그녀는 그 뒤로 내가 이루어온 사랑의 출발점이었다. 많은 사람을 만나며 그들을 그녀와 비교했고 그녀가 사용한 기준들을 마치 내 것처럼 쓰기도 했다. 그녀는 내 감정의 지도였고 숨겨진 나침반이었다.

 다시 사랑에 빠져들 것은 아니었다. 그녀에게 더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너 없이도 나는 잘해왔다고, 그동안 내가 이룬 것들을 그녀 앞에 펼쳐놓고 자랑하고 싶었다. 아마도 그 감정은 여전히 내가 그녀에게 인정받고 싶어한다는 증거이리라.

 “네가 편한 시간에 맞출게. 요즘 바쁘다며.”

 “그냥 직장인이지. 누가 말해줬어?”

 “정혜한테 물어봤어. 걔가 그래도 너랑은 계속 연락하더라.”

 “신기하지 않아? 정말 가까운 사람들은 이렇게 오랜만에 이야기하는데 적당히 거리를 두고 지낸 친구들은 여전히 쉽게 연락할 수 있거든.”

 그 말을 한 나도 들은 그녀도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그토록 가까웠고 서로를 깊이 이해했는데 왜 여지껏 서로를 피해 다녀야 했을까. 헤어졌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심지어 헤어졌다는 것도 누구 한 사람의 잘못은 아니었다. 나도 그녀에게 궁금한 것이 있었다. 그렇게 허무하게 이별하고 내가 그녀에게 묻고 싶었지만 끝내 물어보지 못한 질문이 있었다. 그녀를 만나서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어쩌면 결혼을 앞두고 있는 게 지금의 내 감정을 더 북받쳐 오르게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평소 같으면 무시했을지도 모를 연락을 이렇게 소중하게 받는 것처럼 말이다.

 “혹시 결혼하니?”

 “나? 내가?”

 그녀가 호탕하게 웃었다.

 “축의금 받으려고 사 년 만에 전 남자친구한테 연락하는 그런 사람 아니야.”

 “그렇지? 혹시나 해서.”

 나도 낄낄거리며 웃었다. 이미 그녀를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왜 헤어졌을까. 왜 서로를 헤어진 채로 내버려 뒀을까. 어쩌면 다른 이야기로 이어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성 친구와는 결국 멀어질 수밖에 없다던 흔한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이상하지 않아?”

 “내가 전화 건 거?”

 “우리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하고 있는 거 말이야.”

 “나는 긴장했었다니까.”

 “내가 건 전화도 봤지? 나도 엄청 긴장했어.”

 그녀가 보고 싶었다. 한때 내 삶의 의미를 그녀 곁에서 찾았던 것처럼 다시 그녀를 만나서 그런 힘을 느껴보고 싶었다. 지나치게 멀리만 가지 않으면 괜찮으리라. 너무 과도하게만 나아가지 않으면 이 만남이 조용히 끝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그녀와의 짧은 통화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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