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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주 May 26. 2024

어쩌다 운명을 믿게 되었는지

콩 심은 데 콩 안 나는 인생

아이는 본인의 선택과 무관하게 세상에 나오게 된다.

선택은 부모인 우리가 했을 뿐이다.

분명 잘 키우겠다고 다짐하고 낳아 엄마 아빠 타이틀을 얻었던 것 같은데

머리가 굵어지는 아이의 모습을 보니 잘 키운 거 맞나 싶은 생각에 잠 못 드는 밤을 보내기도 다.


마음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미워 죽겠는데 미워할 수도 없고

밥도 차려 주기 싫은데 결국 밥을 차려 놓고 먹으라고 불러대고

말도 섞지 말아야지 하고 말을 걸어오면 대화하게 되었다.

여기저기서 극한 평가를 받고 와도 보듬어야 했다.


내 한계가 여실히 드러났고 좁고 은 내 그릇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음의 중심을 잡아야만 했다.

마음속에 규칙을 세워야 했다.

나를 세워 찾고 증명해야만 한다.

자식이 주는 혹독한 바람에 뿌리를 더 깊게 박아 지탱해야 했다.

이 나이에 다시 나를 찾고 증명해야 하는 인생을 살게 될지 몰랐다.


하지만 위의 다짐들은 수시로 무너졌고 미지의 존재에게 원망을 쏟아 내기도 했다.

신이시여.. 라며 말이다.


40대 중반

운명이라 생각해야 비워지는 일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인생은 가끔 공갈빵 같다.

부드러운 밀가루가 전체에 발라져 있는 보기 좋은 공갈빵

안이 비어 있는 걸 겉으로는 알 수 없듯

둥글고 평온해 보이지만 속은  빈 공갈빵


공갈빵의 텅 빈 속처럼 나를 공허하게 만들다 못해 철학적 인간으로 거듭나게 만드는 존재는  아들들이다. 

내 고민의 일 순위는 자식이다. 비어 있는 빵 내부의 공허는 자식이다.


공갈빵의 텅 빈 속처럼 내 인생 일부를 자꾸 비게 만드는 원인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토끼 같다 했던 아들들이라니...

지금 토끼 같은 건 반려견뿐이다.


아들들은 등수로 치면 뒤에 몇 명이 없을 정도의 하위권 성적을 받아오면서도 해맑다.

엄마인 나에게도 해맑다.

해맑지 않아야 할 포인트에서도 해맑다.


내가 아이를 키워낸 성실했던 과정보다는 결과로 내 부모됨이 재단되었졌다. 

누군가는 이래서 잘못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저래서 잘못했다고 했다.

만약 결과가 반대였으면 누군가는 이래서 잘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저래서 잘했다고 했을 것이다.


과정 속에서 벅차고 충만했던 기억은 안타깝게 결과로 인한 불안들로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극단적인 점수를 받고도 별 생각이 없는 아들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괴롭다.


아들들의 성적표는 내게 공포 그 자체이다.

사실 부끄럽다.


난 그런 아들들에게

성실하지 못한 대가는 언젠가는 치르게 된다

라며 다소 격양된 말을 하며 눈물을 삼켰다.


그런데 도대체 나는 무슨 연유로 이런 대가를 받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인생사가 뿌린 대로 거둔다는 데 과연 이 말은 진리 일까?

사실 대부분은 그렇다고 생각한다.

노력한 만큼의 결과를 얻는 것이 자명 하지만

자식 문제만큼은 내심 억울하다.


규율을  어긴 적도 없다.

범법 행위는 엄두도 못 낸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 준 일도 딱히 기억에 없다.

베풀었으면 베풀었지 남에게 피해를 주며 살지도 않았다.


최최하위권 성적을 받는 아이는 비율적으로 잘 없기에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도 잘 없을 것이다. 그깟 성적이 뭐라고 저렇게 까지 말을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본인이 겪지 않은 상황을 이해하기란 힘드니 그럴 수도 있다.

어쭙잖은 위로도 어느 순간 받고 싶지 않은 요즘이다.


그러다 우연히 접한 사주팔자에 눈이 갔다.

아이의 사주는 초년에 들어와야 할 글자가 없었다.

난 그때부터 사주팔자라는 것이 정말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말 잘 듣고 공부 잘하는 아이는 보통 인성이라는 글자가 초년에 들어가 있는데 우리 큰애는 특히 대운에도 인성이 없는 무인성 사주였고 그래서 내 말도 안 듣고 공부도 안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 전

상견례 후 남편과의 결혼이 외적 요인에 의해 무산된 적이 있다.

너무 괴로워 엄마와 사주를 보러 갔었는데 그 해 결혼을 하면 절대 안 다고 강력하게 말하는 역술인의 말에 결국 두 해를 넘기고 식을 올리게 되었다. 

그 해 결혼은 겨울에 나무를 심는 것 같은 모습이라 했다.

듣고 나니 찝찝해서 결혼을 미뤘다.

그때 결혼을 밀어붙였으면 어떤 모습의 삶을 살고 있었을까?



살다 보니 팔자 탓을 해야 버텨지는 일들이 생긴 곤 했다.




콩 심은 데 콩이 안나는 경우도 있다.


내가 콩이라면 아들들도 최소 콩 근처에는 가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내 속을 태운다.

자식을 농사에 비유하는 이유가 다 있다.

아무리 마음을 쓰고 키워도 내 마음 같지 않다.



소문으로 들은 날라리 학교 동창의 멋진 삶과 그녀의 우등생 이야기는 내 팔자 타령에 불을 지피 듯 보이지 않는 운명이라는 것이 존재 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자문을 하게 되었다.


죄를 지으면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지만

부조리하게도 그렇지 않은 경우도 더러 본다.

착하게 산다고 모두 복을 받지 않더라

반대로 악하게 살아도 복을 받는 경우도 있더라.


뛰고 날아도 운 좋은 놈은 따라간다는 말이 달리 나온 소리가 아니다.

정말 인생은 내가 느끼지 못하는 운의 기운이라는 것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샤머니즘은 나처럼 마음이 불안하고 답답한 사람 때문에 인류가 생긴 이례로 계속 유지되고 있는 모양이다.

어른들 말처럼 팔자려니 생각하고 살아야 하는 현실의 무게가 꽤나 버겁기도 열받기도 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인생

억울할 때도 물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하고 선하게 살고자 한다.

천성은 못 버리고 읽고 쓰고 뭐라도 한다.

애들이 안 하는 그 공부

나라도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겠다.

이것도 내 운명이라면 받아들이고 내게 더 충실하자 다짐하며 말이다.

쓰고나니 퍽 슬프다.



그래도 한 번 더 잔소리를 해본다.


안 될 것 같으면 책이라도 읽어라

길이 보일 것이다.


내 말은 허공 속 메아리처럼 돌다 사라졌고

아들들은 그럴 마음이 없다.


아이들 얘기를 꺼내는 건 언제나 어렵다.

그럴싸한 문제집 하나 없는 아들의 책상을 보면 내가 아이를 잘못 키웠구나 자책하게 된다.

그러다 억울해하며 팔자타령이 나온다.

팔자려니 해야 터질 것 같은 가슴의 활화산이 한 숨에 좀 내려 가는 듯 하다.



남편은 무탈하게 학교 잘 다니는 걸로 위안 삼자 했고 나는 학원 보내지 말고 그 돈 모아 차나 바꾸자고 했다.


대로 인생이 풀리지 않을 때 사람들은 운명이라는 카드를 끄집어 내서 위안의 도구로 삼는다.

40대 중반 나도 그러고 있다.

운명이려니~~


공부는 엄마나 하는 것~~ 내 책상~~아들 책상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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