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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주 May 12. 2024

건조한 일상도 소중하다.

건조주의보

신체의 건조주의보

바야흐로 20년 전

함께 일하던 k선생님은 교재나 프린트 물을 넘길 때마다 엄지 손가락을 자신의 혀로 가져가 살짝 침을 묻혔다.

그 엄지손가락이 닿은 하얀 종이는 침으로 흐릿하게 엄지 자국 이 남았다.

난 그 자국이 몹시 거북했다.

자동으로 인상이 써지며 미간을 한껏 구겼지만 그렇게 하지 말라는 말은 끝끝내 하지 못했다.

단지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서류나 책장을 넘길 때 손가락에 침을 묻히지 않겠다고 다짐했을 뿐이다.


그로부터 20년 후

학기 초였다.

다양한 안내문이 A4지 산을 이룬다.

종류별로 나열해 놓고 배부할 수량만큼 집어 스템플러 작업을 해야 하는데

건조한 손가락 때문에 종이가 안 집힌다.

종이 위에 손가락이 착 엉겨 붙지 못하고 미끄러진다.

옆에서 지켜보는 선생님 보기가 민망할 정도다.

속이 터진다. 작업은 빨리 마무리해야 하고 손을 자꾸 종이에서 미끄러지니..



젊은 시절에는 느끼지 못했던 건조한 이 느낌이 왠지 씁쓸하다. 손을 비비면 쓱쓱 하며 나는 소리가 적응이 안 된다.


건조라는 말은 내 평생 없을 줄 알았는데

안구 건조

피부 건조

모발 건조

하다못해 손발 건조까지

각종 건조들에 다 해당하게 되었다.


수시로 넣는 인공 눈물

안구 건조는 왜 생기는 건지?


덕지덕지 바르는 화장품

그것도 오전에는 바빠서 얼굴에 흡수되는 양보다 손바닥에 흡수되는 양이 더 많다.


모발은 관리할 시간도 없다. 


선물 받은 핸드크림이 쓰임을 다하지 못하고 버려지던 때가 있었다.


미모를 흘리기엔 많이 부족했기에 보드라운 손이라도 흘리고 다니려 했던 때가 있었는데...


내가 그 옛날 손가락에 을 묻혀 책장을 넘기는 한 때의 인연을 떠올리게 될 줄은 몰랐다.

역시 사람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절대라는 말을 쓰며 타인의 언행을 함부로 비난하면 안 된다는 뼈 때리는 교훈을 얻었다.



혹시 모른다 옆에 동료 선생님이 없었다면 나도 손가락이 입 쪽으로 향했을지도...


나이와 체내 수분양은 반비례 관계 라도 되는 듯 보이는 신체 기관들이 푸석해지기 시작했다.



일상의 건조주의보

특별하지도 특별할 것도 없는 매일매일을 특별한 생각 없이 보내고 있는 중이다.

삶의 주인공이 어느 순간 내가 아닌 나를 제외한 가족들이 된 지도 오래다.

젊을 때처럼 유흥이 즐거울 나이도 아니고 

넓은 인간관계가 인기의 척도를 말해 주던 시절도 지나와 보면 인간관계 역시 부질없다 느껴지기도 한다.

사회생활과 가정생활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니 잡아지기는커녕 쫓아만 갈려도 일상 루틴을 벗어나기 힘들다.

특별하지도 특별할 것도 없고

재미없지도 재미있지도 않은 일상 중

가끔 만나는 지인들과의 약속

혼자 가는 코인 노래방

남편과의 영화관 나들이가 내 일탈의 대부분이다.


매일 똑같은 일상.

무미건조하다고 느낀다.


오랫동안 이런 일상에 젖어 살다 보면 마치 삶에도 관성이 적용되는 듯  일상에서 벗어나는 게 두려워질 때도 있다. 

루틴이 깨지는 것이 어색하고 피곤하다.


루틴에서 벗어나는 날이면 다음날은 밀린 숙제를 해내야 하는 것처럼 바쁘다. 

이유 없이 쫓기는 듯 바쁘다.

이틀 연속 저녁 모임에 몸살기가 도는 것이 일상 속 관성의 법칙을 대변해 주는 듯하다.


불현듯 찾아오는 크고 작은 이벤트 들은 건조한 일상을 파괴하듯 달갑지 않은 엇박자의 추임새를 던진다. 건조함도 시기 대상이 되는 듯 던져지는 엇박자 추임새는 크든 작든 일상에 생채기를 내고 그때마다 자발적 고립을 자처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다 지인의 부고라도 접하게 되는 날이면

이런 굴곡 있는 일상이 또 얼마나 감사하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경사보다 조사를 더 많이 접하는 나이다. 

죽음이 이토록 가깝다는 것은 삶을 영위하고 있는 많은 이들이 알고는 있지만 가까이 두고 싶지 않아 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불시에 날아오는 부고장에 슬픔과 잊고 지내던 공포가 스멀스멀 올라오기도 한다.

생과 사의 중간을 떠돌다 종국에는 같은 결론이 나는 것이 평등한 인간사이니만큼

무심한 듯 흘러가는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식구들의 부재를 확인하는 순간 분비되는 세로토닌에 잠시 행복하다.

건조한 일상도 이토록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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