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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주 Jun 02. 2024

지금은 알고 그때는 몰랐던 것

부모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참 오만하고 교만했다.

연애,결혼, 출산을 다 경험했다

흔해빠진 말로 제 몸 하나 건사가 힘든 내가 

저 모든 것을 경험한 것은 남들이 다 하는 거 나도 해 보자는 도전이기에 앞서 오만과 교만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과정이었다.


그럼에도 남들 하는 걸 다 해 보고 사는 것에 대한 후회와 회한이 있는 것은 아니다.

터득하고 체득하며 희로애락을 겪어보니 허투루 지나가는 경험은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겪어 봐야 아는 것은 인간의 한계다.

인간은 자기의 경험에 입각해 상황을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럴 수 있다.

굳이 겪지 않아도 될 일도 많기에...


마음과 사랑처럼 추상적인 감정들은

특히나 겪어보지 않고서는 이해의 깊이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타인을 함부로 재단하려 들면 안 된다.


누군가 인간이 사는 모습을 비슷하게 그려놓은 이유가 있다면 그 속에서 깨지고 갈려 더 둥글게 되길 바라서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알고 그때는 몰랐던 많은 것들 중 하나가

부모님의 마음이다.



젊은 시절 나는

끝도 없을 것 같은 청춘이 내일 당장 끝날 것처럼 하루하루를 보냈다.

일찍 결혼 한 엄마의 갱년기가 내 20대와 맞물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어느 날 엄마가 우두커니 안방에 앉아

"아빠도 늦게 오고 너네도 늦게 오고 외롭다."

라고 말했다.


엄마에게 갱년기가 왔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아까운 청춘의 시간을 하루도 헛되게 보내지 않지 위해 엄마의 갱년기를 애써 모르 척했다.

내 생활이 엄마의 갱년기보다 소중했던 나는 끝내주게 신나는 젊은 시절을 보냈고 그 시절 만난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결혼하는 날

엄마는 결혼식 날 신부가 울면 행복하게 못 산다는 지어낸 듯한 말을 내게 던지며 울지 말 것을 신신당부했다. 내 결혼 과정이 순탄치 않았음에 나도 내가 눈물을 흘릴까 봐 걱정했지만 남편도 나도 첫째라 많은 하객들과 결혼식의 정형화된 그 식(式) 때문에 울 정신도 없이 결혼식이 지나갔다.


일주일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엄마가 만들어 주신 이바지 음식과

장손 며느리라며 시댁에서 요구한 제기 세트와 병풍을 트럭에 가득 싣고 아빠와 남편과 함께 시댁으로 향하는 날이었다.


새색시 된 기념으로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시댁 대문을 여는데 얼마나 긴장이 되던지..

싸들고 온 이바지 음식과 제사용품 등을 거실에 내린 후 아빠는 아버님과 미리 준비된 음식을  드시며 어색한 대화 몇 마디를 나누셨다. 

불편한 사돈과의 불편한 자리는 얼마가지 않아 마무리가 되었고 아빠가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그때부터 조선 시대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 연출되기 시작했다.

막상 아빠가 간다고 생각하니 이질감만 가득한  시댁에 이제 정말 혼자 남게 되는 순간이 오는구나 싶어 무섭고 두려웠다.

눈물이 났다.

아빠도 울음을 참느라 얼굴이 빨개졌다.

자식을 결혼시킨 개운함이 보다 허전함과 걱정이 앞선 모양인지 아빠 역시 발걸음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울음을 참던 아빠의 빨간 얼굴과 마당을 가로질러 나가던 뒷모습에 눈물 댐이 수문을 열어버렸다.

꽤나 엄하셨던 아빠와 사춘기 시절 적잖은 충돌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사랑 표현은 많으셨던 아빠가 부담스러워 방문에 아빠 출입금지를 써 놓기도 했던 철없던 시절이 있었다.

아빠에 대한 양가감정으로 아빠에게만 까칠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아빠가 나를 두고 간다고 그렇게 울어 댈 것을 그때 방문에 출입금지는 왜 붙여놓아 아빠 마음을 아프게 헤집었나 모르겠다. 

지금 내 자식이 방문에 엄마 출입금지를 써놨다면 난 아마도 미쳐 날뛰었을 것이다.


대문자 T 남편은 이바지음식 해서 간 날

우리 부녀눈물이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곤 한다.

하룻밤 자고 나면 지척에 살면서 또 만날 텐데 그게 왜 울 일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부녀간의 말로 설명하지 못하는 그 애틋함을 남편이 어찌 알까?

애석하게도 딸이 없는 남편은 아마 평생 모를 수도 있다.


아빠가 가고 난 후 한참을  험한 곳에 시집을 온 여자처럼 울던 나는 어머니의 부름에 눈물을 닦고 주방으로 가게 되었다.

엄마가 싸주신 이바지 음식에 어머님이 놀라워하고 계셨다.

엄마는 작은 항아리에 콩나물 다리와 머리를 다 따서 깨끗이 씻어 넣어 놓으셨다. 국에 넣을 무도 적당한 크기로 썰어 담아 놓으셨고 국거리용 소고기도 볶아 양념  항아리에 보기 좋게 담아 놓으셨다.

행여나 딸이 허둥지둥 실수하여 책이라도 잡힐까 싶어서였는지 항아리에 든 음식 외에도 모든 음식을 밀키트처럼 준비해 놓으셨다.

눈물이 또 핑 돌았다.



그렇게 눈물이 핑 돌았던 딸은 출산 후 당연한 듯 산후조리를 엄마께 부탁했다.

염치가 참...

엄마의 직장은 그 당시 친정 집에서도 우리 집에서도 한 시간 거리에 있었다. 출퇴근만 두 시간이 걸리는 고단함에도 엄마는 완벽에 가깝게 딸과 손자를 위해 희생하셨다.

2주 고용한 산후 도우미 이모님이 일거리를 못 찾아 방황했을 정도니 엄마가 얼마나 애를 썼는지 말로 다 못 할 정도로 감사하다.



내가 만약 미혼으로 살고 있다며 

아직 교과서에나 나올 듯 한 말로 부모님 은혜를 표현하지 않았을까?

결혼을 해 보니 가정이라는 따뜻한 울타리를 만들기 위한 부모님의 노력을 알게 되었고

자식을 낳아 키워보니 피 땀 눈물을 다 갈아야 하는 부모노릇이 세상 힘든 업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결혼을 하고 애를 낳아 봐야 부모 마음을 안다라는 말이 있나 보다.



초등학교 입학식 때

선생님이 한 명씩 이름을 부르며 자신의 번호에 신발주머니를 넣도록 하는 미션이 주어졌다. 소심한 내게는 꽤나 긴장되는 초등학교 첫 임무였다.

엄마는 그 순간 뒷 줄에서 기린처럼 목을 빼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고 계셨다.

자식 일은 사소한 것에도 조마조마 맘을 졸이는 게 부모 마음이다.


별 볼일 없는 딸 착하게 자라줘서 늘 고맙다는 엄마

자식은 본인처럼 가난하지 않길 바라며 소처럼 일했던 아빠


늘 우리 남매에게 최선을 다 했던 따뜻했던 두 분

모진 풍파를 몸으로 받아내며 가족의 울타리를 지켜냈던 두 분



아빠 전화다.

"공주야 뭐하노?"

누가 들으면 당최 누가 공준지 두리번거릴 호칭으로 45살 딸을 불러주는 아빠다.

"그르케 부르징마"

누가 들으면 귓방망이를 한대 올리고 싶을 콧소리로 좋은면서도 싫은 척 대답해 본다.



자칫 모르고 살뻔한 부모님의 은혜를 깊이 새기는 40대가 되었다.

그리고 부모님 밑에서 따뜻한 밥 얻어먹고 살 때가 인생에서 제일 좋고 편한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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