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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주 Jan 02. 2024

그렇게 집구석에서 나와버렸다

그날의 행적

난 집을 나와 정처 없이 걸었다.

아들 2호에게는 운동을 간다고 말했다.

내 운동 장소는 아파트 헬스장인데  나의 차림새는 누가 봐도 헬스장을 가는 복장이 아니었음에도 아들 2호는 전혀 눈치를 재치 못했다.

내심 눈치를 좀 채고 걱정해 주실 바랬건만 허공 속 외침처럼 아들 2호는 잘 갔다 오라는 인사까지 해 주었다. 

우리 집 남자들은 내가 보톡스를 맞고 얼굴에 멍이 퍼렇게 들어도 누구 하나 멍이 들었는지 물어봐 주는 사람이 없다. 난 한낱 먼지 같은 존재인가 보다.


패딩에 후드 목도리까지 두르고 길을 나섰다. 목적지 없이 걷기 시작했다.

그때는 연말이었고 더군다나 금요일이었기에

나가는 길목마다 과음으로 토하는 아저씨,

노상 방뇨 하는 취객 등이 보였다.

껴안고 술기운에 기분이 좋아진 취객들은 얼싸안고 호형호제를 외치기도 했다.

마주 보고 지나치는 와중에도 술 냄새가 진동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러다 새해맞이 액땜에 하게 될 수도 있겠다 싶은 이성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친구나 지인을 만날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난 말로 먹고사는 직업을 가진 라 말을 하면서 소모되는 에너지가 얼마나 큰지 늘 느끼는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턴가 수업 외적인 곳에서 말을 하며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아 졌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혼자 하는 뭔가가 편해졌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갑자스럽게 누군가를 호출하는 자체가 당사자에게는 난감한 상황을 만들 수 있다. 난 부탁을 하거나 민폐를 끼치는 것을 꺼려하는 성격이라 갑작스러운 나의 연락에 당황할 지인들을 먼저 생각했다. 연말의 금요일 저녁 9시가 넘은 시간이라 모두 가족 또는 지인들과 연말을 보내고 있을 듯싶었다.


친구들인 갈, 천 , 닭을 떠올렸다.

친구들은 집구석을 박차고 나온 그녀들의 소중한 멤버인 나를 그대로 두지 않을 것임이 분명했지만 만약 그녀들이 회식을 하거나 모임을 갖고 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렇다면 나도 그녀들도 쌍방으로 미안해지는 상황에 놓이게 되니 아예 연락을 할 생각 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향한 곳은 걷다 발견한 어느 사우나였다.

맨몸으로 나온 내가

탕목욕을 즐기지 않는 내가

술을 즐기지도 않는 내가

갈 곳은 커피숍뿐이었는데 시간이 이미 열 시가 넘어갔고 커피숍 마저 문을 닫기 시작했다.

결국 난 사우나로 방향을 틀게 된 것이었다.

목욕 장비가 단 하나도 없었다.

일회용 샴푸라고 있을까 싶어 근처 편의점에 들렀다.

일회용 목욕세트가 무려 7000원. 그것도 남성용이었다. 목욕용품 구입을 포기한 난 편의점 내 로또 용지에 눈을 돌렸다.


순간 우울해서 집을 박차고 나온 아줌마가 우연히 들른 로또 집에서 산 로또 복권의 1등 담청이 되었다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나 일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이건 어쩌면 하늘이 주신 기회일 수도 있다.


난 로또 용지를 집어 들고 편의점 로또판매 칸 작은 의자에 앉아 마킹을 하기 시작했다.

학창 시절 모의고사 omr답안지 마킹 보다 더 신중하게 숫자들을 체크해 나갔다.

로또 담청금을 수령하러 서울로 올라가는 내 모습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5000원어치의 로또를 산 후 사우나로 향했다.


늦은 시간이라 사우나 안은 몇 명 안 되는 사람들로 고요했고 난 탕에 들어가기 전 간단한 샤워를 위해 목욕 용품 공수에 나섰다.

뻔뻔 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지 않은가

옆에 계신 분께 맨몸으로 왔노라며 정중 또 정중하게 목욕 용품을 좀 쓰겠노라 부탁드렸다.

흔쾌히 샴푸와 린스 등을 빌려준 알몸으로 만난 일면식도 없는 그분께

"잘 썼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고마움을 전했다.

"아이고 이런 데서는 빌려 쓰고 하는 거예요" 라며 내 미안함에 답해 준 그분 덕에 마음이 조금 풀렸다. 항상 작은 친절은 큰 감동을 준다


뜨뜻한 탕 속으로 지친 몸을 스르르 밀어 넣었다.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로또에 걸리면 가사 도우미 이모님을 고용하겠다고 생각하며 탕 속에 몸을 담그고 눈을 감았다.


그렇게 집구석 탈출기가 별거 없이 마무리되었다.

로또도 물론 이변 없이 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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