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못 먹었는지 다리가 휘고 몸이 깡말랐었어.”
엄마를 처음 만났을 때, 내 다리는 안짱다리로 휘어있었고, 빼빼 말라서 금방이라도 부스러질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갈 곳 없는 내가 불쌍해서 외면할 수 없어 같이 살기로 했답니다.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상상도 못 할 만큼 볼품이 없었지요. 아빠는 내가 금방 죽을 거라며 데려오는 것을 반대했답니다. 간장과 밥만 먹었던 나는 그마저 입이 짧았습니다. 엄마는 내가 정말 죽어버릴까, 조금이라도 더 먹여서 살을 찌우려고 사골을 끓이고, 영양제를 먹이고, 당신은 먹지 못해도 나를 먹이려 건강에 좋다는 모든 것을 주었습니다. 덕분에 나는 지금까지 살아있을 겁니다.
엄마는 휘어버린 다리를 펴겠다고 밤마다 자는 내 다리를 주무르고, 낮에는 고무줄을 잡아주며 고무줄놀이로 재활 운동을 시켜주었습니다. 어렴풋이 장면이 기억이 납니다. 나를 보며 다정하게 웃던 엄마의 모습이 지금의 모습과는 많이 달려졌습니다. 사진 속 엄마는 지금 내 나이였지만, 아가씨처럼 고왔습니다. 사람들이 내 다리를 보고 수군대기라도 할까, 내 옷에도 크게 신경을 썼습니다. 살림이 어려워도 나를 위해 쓰는 돈은, 아끼지 않았습니다. 원피스와 모자, 그리고 구두와 크로스 백까지. 엄마를 만나고 찍은 사진에는 레이스가 들어간 원피스와 모자, 그리고 예쁜 구두를 신은 내가 많습니다. 그 누구보다 사랑을 듬뿍 받은 아이처럼 사진 속 내가 웃고 있습니다.
유독 키가 크지 않아 초등학교 때 내내 1번을 독차지했습니다. 엄마는 나를 ‘난쟁이 똥자루’라고 불렀습니다. 실내화 가방을 들고 다니면 바닥만 헤져서 구멍이 나곤 했습니다. 키가 작아서 어쩔 수 없다면서도 멀쩡한 가방이 자꾸 구멍이 나니 속상해하는 엄마가 생각납니다. 돈이 없어도 내 키를 키우기 위해 6년 내내 우유 급식을 신청했습니다. 당시 아이들 영양제인 원기소도 오랫동안 먹었습니다.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돈이 많이 들어가는 아이였습니다.
엄마는 식모였습니다. 지금의 말로는 상주하는 가정부나 파출부쯤 되는.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남의 집에서 밥과 살림을 해주는 직업이었습니다. 주인아저씨는 엄마보다 스물한 살이 더 많았습니다. 나는 그분을 ‘아빠’라 부르고 자랐습니다. 우리는 모두 ‘동거인’이라는 이름 아래 한집에 살았습니다. 아빠는 엄마가 나를 키우는 것을 불만족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객식구가 한 명 더 늘었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보내줬으면 됐지, 무슨 중학교에 보내? 집에서 살림이나 시키지.”
“손 안 내밀고, 내가 알아서 벌어서 학교 보낼 거니 간섭하지 마쇼!”
아빠는 내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엄마와 자주 다투었습니다. 엄마는 어린 내가 초등학교만 나와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냐며 싸웠지요. 긴 싸움 끝에 나는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엄마는 약속대로 온갖 일을 하며 내 학비를 마련하였습니다. 내가 좋아하던 지우개 포장과 귀걸이 포장, 붕어빵 봉투 부치기, 상자 접기, 인형 만들기, 시간제 파출부일까지. 엄마 말대로 100원짜리 요구르트 하나 사 먹지 않고 ‘악착같이’ 벌어서 오로지 나를 위해서만 돈을 썼습니다.
“한여름에도 너무 더워서 요구르트 하나 사서 먹으려고 해도, 100원이 너무 아까워서 그걸 못 사 먹었어. 내가 그렇게 지독하게 돈을 아껴서 너 가르치고 키웠다!”
“사 먹지 그랬어! 엄마는 똑같은 말을 몇 번이나 하는 거야?”
물에 빠진 사람 구해주면 보따리 내놓으라 해서 ‘착한 사마리아인 법(위급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도와주려 할 때 법적인 책임으로부터 그 사람을 보호하는 목적)’이 생겼다고 합니다. 엄마에게 큰 은혜를 입어놓고 엄마의 넋두리 한번 제대로 들어준 적이 없습니다. 고생한 엄마가 물론 가엽기도 하지만, 나도 마음고생 심했다며 나밖에 모르는 내가 스스로 생각해도 참 못됐습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을 갖는 자체가 ‘마음으로 낳은 아이’가 아닌 ‘진짜 내 엄마’라는 마음이 더 크기 때문인가? 생각도 들고요.
엄마에게 나는 ‘세상에서 제일 귀한 딸’이 맞습니다. 엄마 또한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귀한 엄마’이고요. 그렇기에 지금까지 함께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엄마와 함께한 44년. 한집에서 함께 살면서 불편할 때도 있고, 다투기도 하고, 참견 아닌 참견도 하고 삽니다. 당연히 서로 힘든 시기도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가 함께하는 이유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라는 것을 어쩌면 잘 알아서 일 테지요.
내가 이 세상에 발붙일 곳 없이 힘겹게 살아야 할 때, 엄마는 나에게 딛고 설 땅이 되어 주었습니다. 내 두 다리에 힘이 들어갈 수 있게 지지해주었고 나는 세상을 걷고 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엄마가 나에게 그렇게 큰 힘이 되어 준 것처럼, 나도 엄마에게 의지가 될 수 있는 인생의 끝자락 든든한 보호자가 되고 싶습니다.
평소에 사소한 일들로 다투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깊이 생각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당장 감정은 속상하겠지만 들여다보면, 이것은 일상입니다. 엄마가 잔소리하는 것도, 내가 엄마에게 짜증을 부리는 것도, 아픈 엄마가 안쓰러운 것도, 아이 신경 쓰랴 직장 생활하랴 매일 피곤한 나를 걱정하는 것도, 크게 보면 ‘사랑’하기에 일어나는 ‘일상’ 아닐까요?
“엄마, 나 사랑해?”
“사랑하니까 지금까지 키우고 같이 살았지. 하는 것 보면 답답하지만.”
“뭐야. 안 사랑하네.”
엄마가 나에게 준 사랑과 희생만큼 다시 돌려주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 크기와 깊이를 알 수 없거니와 내가 줄 수 있는 게 별로 없기 때문이지요. 엄마 마음에 들지 않을지언정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겁니다. 엄마를 보내고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