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km 도전
이라 쓰고 '피자 파티'라 읽는다.
우리는 가장 먼저 각자의 폰에 러닝앱을 설치했다. 폰을 넣고 달릴 수 있는 러닝벨트도 구입했다. 토토는 자기 폰에 앱을 깔고 음성 가이드를 들으면서 달릴 수 있다는 것과 달리기를 위한 나름의 장비가 생겼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소소한 기쁨이다. 토토에게 필요한 건 소소하게 기쁘고, 소소하게 웃을 수 있고, 소소하게 성취할 수 있는 일들이었던 것 같다.
3학년이 되고 나서 토토는 하교 후 집에 올 때마다 한숨을 쉬었다. 토토의 말에 따르면 자신은 반에서 키 작고, 달리기 못하고, 축구 못하고, 공부 못하고, 인기도 없는 그런 아이였다. 정말로 본인의 자아상이 그렇다면 나라도 학교에 다니기 싫을 것 같았다. 3학년 1학기 학부모 상담 때 선생님은 토토가 내면에 뭔가 억눌린 부분이 있는 것 같다며 심리 상담을 조심스레 권하셨다. 상담 첫날, 상담 선생님은 토토의 자존감이 매우 낮은 상태라고 진단을 내리셨다. 토토가 게임에 집착했던 이유가 백번 이해됐다. 게임은 어둡고 삭막한 그의 세상을 잠시나마 밝혀주는 한줄기 빛이었을 것이다. 게임하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당분간 게임을 금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지금은 토토가 좋아하고 의지하는 친구니까. 대신 토토에게 게임 말고도 이 세상에 많은 즐거움이 존재한다는 것을 하나씩 가르쳐 주면 될 것이다. 달리기를 통해 토토가 누렸으면 하는 건, 아침 공기를 뚫고 달리는 상쾌함과 달리기 중간에 까먹는 초코바의 달콤함, 내 발에 딱 맞는 러닝화의 쾌적함, 사계절의 냄새,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의 색깔, 땀 흘린 후의 개운함, 무엇보다 달리기를 하면서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 행복 같은 것들이다.
“토토야! 오늘 엄마 이어폰을 줄 테니 귀에 꽂고 달려봐”
토토는 순순히 달릴 채비를 했다. 오늘의 목표는 5km를 달리는 것이다. 우리 집에서 삼각지까지의 거리다. 목적지인 삼각지에 도착하면 역 바로 앞에 있는 피자집에서 피자를 먹기로 약속했다. 러닝앱에서 코스를 설정하고 나란히 허리에 러닝벨트를 찬 뒤 빠른 걸음부터 시작했다. 실랑이 없이 이렇게 순조롭게 출발할 수 있다니 감개무량했다.
토토는 이어폰에서 음성가이드가 흘러나오자 반색을 하며 좋아했다. 뭔가 짠했다. 이어폰을 꽂고 뭘 들어본 적이 없으니 나름 신세계를 경험하는 중일 것이다. 보폭을 넓게 해서 아파트 단지를 따라 걸었다. 그런데 토토는 이내 이어폰이 귀에서 자꾸 빠진다며 짜증을 냈다. 어른 이어폰은 커서 아이 귀에 맞지 않았다. 토토에게 새 이어폰을 사주기로 단단히 약속을 하고 다시 달렸다. 우리는 가볍게 달리며 아파트를 벗어나 지하철역을 지나고 한강대교를 건넜다.
“저 빨간 자동차 따라잡자~”
“어? 저 회색 차는 우리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대교를 달리는 자동차를 경쟁자 삼아 경주를 하듯 깔깔 웃으며 달렸다.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즐겁고 이상적인 러닝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3km 지점인 용산역쯤 왔을 때 우연히 발견한 BTS 소속사 건물 앞에서 사진도 찍었다. 차를 타고 다닐 때는 몰랐던 소소한 재미였다. 용산을 지나자 토토의 체력이 급감하기 시작했다. 폰을 벨트에서 꺼냈다 넣었다를 반복하더니 삼각지까지 얼마나 남았냐고 10초 간격으로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토토에게 짜증을 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응, 딱 2킬로 남았어! 힘내! 할 수 있다!!”
나는 토토만의 치어리더가 되어 나머지 2킬로를 달렸다. 힘들어하던 아이는 삼각지역 표지판을 보자 잠잠해졌다. 그리고 5분 뒤, 우리의 목표지점인 피자집의 건물이 멀찍이 보이자 환호를 지르며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인간은 역시 가시적인 목표가 있을 때 더 힘을 낼 수 있고, 거의 다 왔다는 성취감이 더해질 때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나 보다.
집에서 출발한 지 1시간 만에 피자집에 도착했다. 첫 목표달성이다. 나는 토토에게 목표달성!이라고 소리를 지르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토토는 야단법석을 떠는 내게 ‘옛다 하이파이브’ 하듯이 대충 한 손을 부딪히고는 피자집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토토는 피자를 고르며 행복해했다. 가장 비싸 보이는 피자를 당당하게 손으로 가리키며 ‘이거!’라고 했다. 이건 성취의 기쁨을 표현하는 그만의 방식이었다.
밖에 갑자기 폭설이 내렸다. 러닝이 끝난 후라서 천만다행이었다. 다이어트 중이긴 했지만 우리의 작은 승리를 기분 좋게 자축하고 싶어서 피자와 음료를 양껏 주문했다. 그런데 가게 주인이 테이크아웃만 된다고 했다. 이 피자를 들고 어디 가서 먹어야 하오리까. 주문한 피자가 준비되는 동안 토토와 나는 피자를 어디서 먹을지 의논했다. 밖에서 눈을 맞으며 서서 먹을까, 낭만적이겠지? 하고 무리수를 뒀다가 그냥 지하철역으로 들어가 먹기로 했다. 앉아 먹을 벤치를 찾았다. 아무리 눈알을 굴려봐도 앉을 만한 공간이 찾을 수 없었다. 아침 공복에 허기진 토토가 조금씩 예민해져 가는 기운이 느껴졌다. ‘벤치를 찾아야 한다...! 중대 미션이 시작됐다. 토토의 심기가 불편해질까 봐, 그래서 토토가 짜증을 내고 나도 같이 짜증을 내서 지금까지 잘 쌓아온 긍정과 희망의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질까 봐 겁이 났다.
“벤치의자가 나올 거라고 생각하면서 찾아보자. 엄마는 왠지 있을 것 같은데?^^” (제발 하나님!!!)
그건 토토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나의 처절한 기도였다. 무거운 피자 봉지를 들고 지하철 역사를 발바닥 땀나도록 돌아다니는데도 토토는 어쩐지 말이 없었다. 토토의 궁시렁 백그라운드 사운드가 시작되고도 남을 타이밍인데 너무 조용해서 더 미안했다. 그가 변한 것일까. 난 토토에게 애써 웃어 보이며 한 층 더 내려가보자고 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니 정면에 원형 벤치가 우리를 딱 기다리고 있었다.
“맞지? 있다고 생각하고 찾으면 있다니까!” (휴우우)
토토는 “진짜네” 라며 웃었다. 나는 희망과 긍정 전도사로서의 체면을 간신히 지킬 수 있었다. 둘이 벤치에 앉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피자 두 판을 깔아놓고 숨도 안 쉬고 먹었다. 토토는 ‘소스가 맛있다, 치즈가 맛있다, 눈이 와서 더 맛있다 등등 믿을 수 없는 긍정의 언어를 쏟아내며 피자를 7조각이나 흡입했다. 토토는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도 내게 쉬지 않고 이야기를 했다. 99%는 어제 했던 게임 이야기였다. 나는 이야기를 듣는다기보다 환희에 차서 종알종알 얘기하는 토토의 얼굴을 감상하는 쪽에 가까웠다. 행복해 보였다. 5km를 달린 것보다 그런 토토의 얼굴을 보는 것이 좋았다. 그걸로 충분히 만족스러운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