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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썸머 신 Jan 31. 2024

마라톤 할 결심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없었다.



“토토야, 일어나! 달리기 하러 나가자”

“.... 싫어. 집에 있을래”

“니가 같이 달리고 싶다며”

“그냥 집에 있을 거야”

“너 진짜...... (이를 어쩌지 -_- 나도 나가기 싫은데)



솔직히 그랬다. 나도 집에 있고 싶었다. 집돌이에게 한겨울에 이불 밖을 나오는 건 나름 도전이다. 거기다 이른 아침에 겨울 칼바람 맞으며 달리기까지 하려면 진짜 큰 맘을 먹어야 한다. 토토가 달리기를 원하지 않으면 그냥 집에 있어도 된다. 그렇지만 나는 어떻게 해서든 꼭 옷 입고 신발 신고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이렇게 하나, 둘씩 놓아 버리면 포기하는 게 습관이 될 것 같았으니까. 이 달리기를 못 뛰면 앞으로 우리에게 희망이 있을까.


지난 2년간 나는 인생의 겨울을 지나온 것 같다. 심신은 늘 지쳐 있었다. 에너지는 금방 소진됐고, 좋은 음식을 먹어도, 좋은 곳엘 가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도 풀 충전이 되지 않았다. 몸속에 망가진 배터리가 있는 것 같았다. 심장이 자주 두근거렸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면 순간적으로 긴장이 밀려와 숨이 안 쉬어질 때도 많았다. 그럴 때면 화장실에 간다 말하고 바깥에 나가 심호흡을 하며 걸었다. 호흡을 안정시키고 온몸의 긴장을 털어내기 위해 혼자만의 사투를 벌였다.


나는 그것이 공황장애의 일종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인지했다. 내가 그동안 좋아했고 열정을 쏟았던 일들은 모두 일시정지 된 채 방치됐다. 겨울잠을 자는 것 같았다. 배우고 도전하고 성장하는 삶 같은 건 옛날 일이었다. 예전의 파이팅 넘치던 나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럴 순 없을 것 같았다. 지금은 변한 나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웅크렸던 몸과 마음을 살살 움직여 회복할 때다. 몸을 움직이면 마음도 따라 움직인다고, 나는 집안에서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건 토토도 마찬가지였다. 움직여야 했다.


“일어나, 무조건 나갈 거야, 나가야 돼!”


이 달리기는 나와 토토에게 ‘고작 달리기 따위’가 아니었다. 이 달리기가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이란 생각이 들자 나는 사뭇 경건해졌다. 이런 내 속을 알 리 없는 토토는 여전히 이불속에 누워 현란한 손놀림으로 머리카락을 돌돌 말아 꽈배기를 생산해 내고 있었다.


“머리 그만 꼬고 일어나라 좀!”


토토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신경질 가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토토가 솔깃해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작년 가을에 축구대회에서 참가상으로 받은 메달을 가족들에게 자랑하던 토토의 모습이 떠올랐다.  


“토토야, 너 달리기로 메달 딸 수 있는 거 알아?

“뭐”

“마라톤 대회 나가볼래?”

“싫어”

“마라톤이 뭔지는 알아?”

“아니”

“마라톤은 끝까지 달리기만 하면 등수에 상관없이 메달을 줘. 너 지난번에 축구대회 나가서 메달 받았지? 마라톤 나가면 또 메달 받을 수 있다. 어때? 도전?”


‘메달’이라는 말에 동태 같던 토토의 눈빛이 미세하게 살아나고 미간도 펴졌다.


“3등 안에 못 들어도?”

“응, 결승선까지 달리기만 하면 돼”

“흠..”

“마라톤 준비해 볼까?”

“..............”

“메달 한번 따볼까?”

“....................... 응”  


시원스러운 대답은 아니지만 어쨌든 토토가 해보겠다고 했다. 생전 처음 마라톤을 준비하지만 걱정할 것이 없었다. 우리에겐 유튜브가 있으니까. <마라톤 초보 준비>라고 검색하니, 역시나 정보들이 차고 넘쳤다. 세상에는 마라톤을 취미로 하고 있고, 고수가 된 이들이 참 많았다. 마라톤 대회가 이리 많은지도 처음 알게 됐다.


많은 영상들 중에서 진중하고 친절해 보이는 중년의 남자분의 영상을 선택했다. 마라톤을 처음 시작할 때 뭐가 필요한지 아주 쉽고 세세하게 알려 주셨다. 나와 토토는 각자 노트를 펼쳐 놓고 중요한 내용을 필기하며 토씨하나 놓칠 새라 집중했다. 토토는 꽤 진지하게 임했다. 노트 필기의 주요 내용은 이러하다.


Step1. 이어폰 준비

Step2. 러닝앱 설치하기

Step3. 언제 달릴지 정하기

Step4. 쉬는 날짜, 쉬는 방법 정하기

Step5. 달릴 장소 정하기

Step6. 신발 준비하기

Step7. 기능성 소재 옷 준비하기

Step8. 마인드 튜닝

Step9. 실행


마인트 튜닝이 중요하다고 했다. 달리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매일 나의 마음을 살피고 조율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매일 달리기 관련 영상을 2-3개씩 보며 지속적으로 동기부여를 해줄 필요가 있다고 했다. 마지막 단계에 굳이 ‘실행’을 집어넣은 게 재밌었다. 말 안 해줘도 알지만 가장 힘든 것이 실행이다. 너무 잘 알아서 눈물이 난다.


토토는 마라톤 고수 아저씨의 말씀을 한 글자 한 글자 정성 들여 필기했다. 그 모습은 새로운 다짐을 하는 듯도 보였고, 그동안 힘을 내고 싶었는데 잘 안되었다고 말하듯 보이기도 했다. 연필을 꼭 쥔 아이의 손을 보면서 나도 말하고 싶었다. 엄마도 힘을 내보겠노라고.


그날 나와 토토는 동기 부여를 위해 기안 84의 풀 마라톤 도전 영상을 봤다. 토토는 수백 명이 동시에 우르르 달리는 마라톤 현장의 모습에 꽤 고무되었다.


나는 기안 84가 컴퓨터 앞에 앉아 풀 마라톤 접수를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에라 모르겠다’하면서 신청 버튼 누르던 장면이 두고두고 생각났다. 한 번도 안 해 본 도전 앞에 선 그의 떨림이 느껴졌다. 언젠가 나도 그런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 ‘에라 모르겠다’ 눈 질끈 감던 기안 84를 떠올리게 될까?


지금은 ‘에라 모르겠다’ 하며 용기 내어 도전할 만한 목표가 없다. 그저 오늘 움직여야 할 이유를 만들어 내기 위해 마라톤을 결심했을 뿐이다. 오늘의 이 움직임이 우리에게 어떤 마음의 변화를 이끌어낼지 살짝 기대하면서.


토토야, 내일은 제발 이불 밖을 나가보자.

‘에라 모르겠다’ 구호를 외치면서 눈 질끈 감고 이불킥을 날리는 거다.


후우우- 심호흡 한번 하고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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