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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썸머 신 Feb 15. 2024

상한 마음으로 달리기를 했다.

너와 나의 신경전

아침 9시, 오늘은 집 근처 대학교 대운동장 트랙을 한 시간 코스로 돌기로 했다.


채비를 하고 나오니 하늘빛이 어두컴컴하고 을씨년스러운 것이 심상치 않다. 아니나 다를까 분도 안되어 눈발이 흩날렸다. 큰맘 먹고 러닝을 나올 때마다 눈이 내린다. 빠른 걸음으로 앞서 나가는 내 등 뒤에서 ‘아씨, 추워’ ‘왜 먼저 가냐고!’ 하는 토토의 불평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집을 나서는 것 다음으로 가장 힘든 일은 이런 토토의 짜증을 받아주고 잘해보자고 다독이는 일이다. 연습을 할 때마다 토토는 초반을 힘들어한다. 평소에는 밑도 끝도 없이 나한테 달리기 시합하자고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던 녀석이 이제 맘껏 뛰라고 멍석을 깔아주니 걷는 것도 버거워한다. 내가 하라고 하니까 달리기조차 숙제처럼 느껴지는 걸까.


“추우면 살살 뛰어봐! 그러면 몸에 열이 나면서 안 추워!”


너무 추웠다. 나 또한 추위를 이기려면 뛰어야 했다. 그렇게 내가 먼저 뛰면 토토도 속도를 낼 줄 알았다. 그런데 토토는 여전히 점퍼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모자를 눌러쓴 채로 터덜터덜 걸었다. 토토와의 거리는 점점 벌어졌다. 러닝앱의 음성 가이드 아저씨는 이제 힘차게 속도를 내서 달리라고 하는데 나는 계속 앞으로 달릴지 토토의 속도에 맞춰야 할지, 이래저래 심경이 복잡했다.


‘내가 안 보이면 알아서 쫓아오겠지’


그냥 계속 달리기로 했다. 앱에선 러닝 할 때 듣기 좋은 플레이 리스트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내 귀엔 그저 소음일 뿐 신경은 온통 토토에게 가 있었다. 삼분쯤 달리다가 제자리걸음 뛰기를 하며 토토를 기다렸다. 하도 안 와서 설마 집으로 혼자 돌아간 건 아니겠지 불안해지던 찰나에 토토가 코너를 돌아 느릿느릿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런 의지도 없는 종이인형 같은 모습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왜 안 뛰어!”


나도 모르게 소리를 꽥 질렀다.


토토 역시 “춥다고!!!”라며 꽥 소리를 지른다.


“안 뛰니까 춥지!! 뛰라고!”


그렇게 샤우팅을 지르고 돌아서는 내 마음에 감정의 소용돌이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짜증 나고 화가 났다. 그런데 지금 되돌아보면 그때의 내 감정은 정확히 '무기력'이었던 것 같다. 내 노력과 열심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할 때 느끼는 낙심 같은 것이다.


‘내 욕심일까? 이게 과연 토토를 위한 걸까? 같이 힘을 내고 싶어서 계획한 시간인데 왜 나는 자꾸 화가 나고 힘이 들까. 왜 이렇게 여유가 없을까. 그냥 그만둘까? 그러면 이제 앞으로 포기하는 게 아무렇지 않겠지? 그건 너무 싫은데. 아 그냥 생각하지 말고 달리자. 이제 시작이잖아’


이런 생각들을 하며 전력질주했다. 아무 생각이 안 들 때까지 뛰고 싶었다. 그 사이 눈발은 점점 더 굵어졌고 세상은 금세 하얗게 변해있었다. 거센 바람과 만난 눈송이들이 눈보라로 진화하여 내 얼굴을 마구 강타했다. 얼굴과 귀가 얼어 감각이 마비됐다. 사실 난 이 히말라야 같은 추위보다도 눈보라를 맞고 죽상을 하며 걸어올 토토가 더 두려웠다. 난 토토를 생각하느라 너무 많은 감정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었다.


설상가상 우리가 연습을 하기로 한 대학교 운동장 입구는 막혀있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제자리 뛰기를 하며 아직 학교에 진입하지 못한 토토를 기다렸다. 토토가 어떠한 말을 하더라도 난 결코 화내지 않으리라. 분노하지 않으리라 마음을 다잡았다.


얼마 후 나타난 토토는 주머니에 손을 꽂고 종종걸음으로 뛰고 있었다. 그런데 나를 보자마자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걸었다. 설마 지금 나랑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건가? 왜 저러는 거야 도대체.  


“토토야! 대운동장 막혀있어. 그냥 캠퍼스 한 바퀴 돌자!”

“아 진짜!”

“토토야! 지금부터는 계속 달려야 해! 얼른 뛰고 맛있는 거 사 먹자! 오케이?”

“싫다고”


나는 그 말을 모른 척하고 뛰었다. 그날만큼은 나도 토토에게 져주고 싶지 않았다.


“토토! 할 수 있다!! 파이팅!!”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경고 같은 파이팅을 외쳤다. 토토는 내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뛰자 자기도 지지 않겠다는 듯 아예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힘껏 달렸다. 토토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캠퍼스를 한참 달리다가 너무 멀리 왔다 싶어 슬그머니 되돌아가보니 토토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우두커니 서서 땅만 보고 있었다.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버린 꼬마 눈사람 같았다.


‘오늘 나한테 개기기로 확실히 노선을 정했구나’.


결국 난 폭발하고 말았다.


“너 여기서 뭐 해!”

“왜 나 놔두고 가냐고!”

"뛰라고 했잖아! “

“싫다고”

“니가 마라톤 하고 싶다며!!!! “

“마라톤 안 할 거야!”

“또 포기? 맨날 포기하면서 살 거야!!!!! 그렇게 살거야아아아아!!!!”


난데없는 고함소리에 대학생들이 지나가면서 흘끔 쳐다봤다. 너무 창피하다는 걸 알지만, 나의 분노는 그 어떤 쪽팔림도 넘어설 만큼 압도적이었다. 토토는 원망 가득한 눈으로 날 째려봤다. 그 눈빛을 보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는 더 이상 내가 원하는 대로 끌고 갈 수 있는 품 안의 아기가 아니었다. 강요할 수가 없었다.


“엄마는 포기 안 할 거야. 너는 그만두고 싶으면 그렇게 해. 그런데 엄마는 안 그러고 싶어. 집에 먼저 가든지, 기다리든지 해.”


나는 혼자 남은 러닝 거리를 채우기로 했다. 신경 안 쓰는 척하면서 흘끔 나를 살피는 아이의 시선을 느끼면서 그냥 달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무심한 듯 계속 달렸지만 속은 상할 대로 상해 있었다. 계획한 러닝시간을 오기로 꾸역꾸역 다 채웠다.


“가자....”


토토는 조용히 내 뒤를 따랐다. 미운데 또 눈을 맞으며 온몸이 얼었을 토토가 안쓰러웠다.


“토스트 사 먹을래?”

“............ 응


캠퍼스 근처 토스트 집을 찾아가는 길에 폰을 켜보니 배터리가 1% 남아있었다. 러닝앱이 생각보다 배터리를 많이 잡아먹은 모양이었다. 생각지 못한 변수에 나는 매우 당황했다. 평소 모바일로 결제를 하기 때문에 배터리가 없으면 우린 토스트를 사 먹을 수 없다. 몸을 덜덜 떨며 따라오고 있는 토토에게 차마 말할 용기가 안 났다. 백 미터 정도를 의미 없이 걷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저.. 토토야. 우리 그냥 집에 가서 밥 먹자”

“싫어. 토스트 먹을래”

“토스트집이 오늘 문을 안 연 것 같은데”

“그럼 딴 거 먹자”

“.......... 사실 엄마 폰 배터리가 다 돼서 결제를 못해”

“..........”

“.......... 미안

“이쒸...”


생각보다 난리가 나진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토토와 떨어져 말없이 걸었다. 앞으로가 고민됐다. 내가 더 힘을 내는 게 맞는지, 토토의 속도에 맞춰 주는 게 맞는 건지. 토토를 키울 때 매사 그 부분이 딜레마였던 것 같다. 엄마 경력 11년 차임에도 매년 똑같은 질문을 맴돌고 있다. 자녀 양육은 내 인생의 가장 어려운 숙제다.


토토는 온기 가득한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바닥에 대자로 누워 몸을 비비며 해사하게 웃었다. 이 녀석은 그냥 집이 좋은 집돌이일 뿐이었던 건데 내가 너무 심각했었나 싶다. 토토의 웃음에 주책없이 내 마음이 녹는다. 아이의 웃음은 저항 불가한 그 무엇이다. 우린 LA갈비를 구워 먹으며 아무렇지 않게 일상으로 돌아갔다.


눈보라도 어느새 그치고 해가 떠 있었다. 내 마음에 휘몰아치던 낙심과 절망의 소용돌이도 지나갔다. 이렇게 전쟁 같은 아침이 지나고 하루가 지나면 새 날이 찾아온다. 그러면 난 또 새롭게 시작할 것이다. 다음 러닝 때는 몸과 마음이 더 여유로워지길, 행여나 그대로여도 괜찮았으면 좋겠다.


후우우- 심호흡 한 번 하고,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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