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의 아니게 우리는 관계를 일찍 끝내고 나서도 쉽게 잠을 청할 수 없었다. 진이 계속 불안해했다. 난 그를 위해 뜨거운 커피를 끓여주었다. 새하얀 런닝과 푸른빛이 도는 속옷만을 입은 채 내 앞에서 커피를 마시는 진은 아까보다 안정되어 보였다. 나도 슬립에 카디건만을 걸친 채 그의 앞에서 커피를 홀짝이며 진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나보다 세 살이나 어린 그는 뚜렷한 이목구비에 깔끔한 인상을 지녔다. 그러나 그의 얼굴엔 아이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순진함 같은 것이 늘 서려 있어 실제 나이보다 더 어리게 보인다. 진은 나와는 다른 외모와 분위기를 지녔고 나는 그의 그러한 점을 좋아했다.
커피를 다 마시고 난 그는 쨍- 소리를 내며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여유를 되찾은 그의 입가엔 미소가 담겨 있다.
“다 마셨어? 더 끓여줄까?”
“아니.”
그의 커피잔을 싱크대에 놓고 돌아오면서 나는 그가 아까보단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불안해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다.
"아까 아무 소리도 못 들었어?"
"아무것도 못 들었는데. 무슨 소리가 계속 들린다고?"
"응…. 그 비닐봉지에서. 계속 소리가 들려."
비닐봉지? 나는 진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바로 알 수 없었다. 내가 그를 뚫어지게 보고 있자 그가 나를 끌어당겨 의자에 앉혔다.
“우리 아파트 앞에 심어진 나무 있잖아. 그 나무꼭대기에 있는 나뭇가지에 비닐봉지가 걸려있어. 며칠 전부터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는데, 그 비닐봉지가 바람에 흔들려서 소리를 내는 거야.”
그는 꽤 의미심장한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왜? 그냥 바람에 날려서 비닐봉지가 걸렸나 보지.”
“아냐, 그게 아니야….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 금방 또 어딘가로 날아갈 줄 알았어.”
그는 손사래를 치더니 갑자기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그의 모습이 갑자기 당혹스러워지고 만다. 그러나 진은 이미 꽤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모양이었는지, 한참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처음엔 그냥 봉지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작은 소리가 들렸어. 그런데 매일 들리는 그 소리가 달라. 그 봉지 안에 있는 게 자꾸 소리를 내고 있어.”
그는 계속해서 뭐라고 말을 이었지만, 나는 그의 옆으로 가서 진을 안아주었다. 이 남자는 늘 이렇게 예민하다. 내가 안아주자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어서 자야지 않겠느냐고 말하며 그를 침실로 이끌었다. 그러자 그는 곧 내 손을 잡은 채 어린아이처럼 침대 안으로 기어들어 왔다. 이불을 덮어주고 가만히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내 쪽으로 몸을 돌린 채 바싹 다가와 안겨있는 그가 어렵사리 눈을 감았다. 시간이 지나도 잠을 이루지 못하던 그가 겨우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잠든 그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나는 어두컴컴한 허공을 응시한다. 곧 가을이라 그런지 괜히 싸늘한 한기가 몸 깊숙이 파고드는 것 같았다. 시계를 보니 3시. 앞으로 4시간밖에 자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며 진에게서 등을 돌려 눕는다. 그런데 갑자기 나의 모든 의식을 붙잡는 소리가 들려왔다.
쨍그랑, 쨍그랑….
흡사 깡통이나 캔이 부딪히는 소리와 유사했다. 몸을 돌려 창을 바라보았다. 창 바깥에서 나는 소리였다. 띄엄띄엄 들려오던 소리는 이윽고 바람 소리와 함께 여러 개의 캔이 한꺼번에 떨어지는 것과 같은 큰 소리를 냈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온몸이 긴장되었다. 누가 이렇게 새벽에 쓰레기를 요란하게 버리는 거지? 짜증이 치밀어 윗몸을 발딱 일으켰다. 그런데 그 순간 소리는 뚝, 끊기고 말았다. 순식간에 조용해졌지만, 뭔가 이상했다. 끊긴 소리는 마지막 캔 하나가 구르듯 떨어지며 잔잔히 잦아드는 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 오디오로 조종한 듯 인위적으로 잘라낸 것 같은 소리였기 때문에. 환청인가? 그렇게 시끄럽더니 이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니야, 환청일 리가 없어.’
진이 아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괜히 온몸이 뻣뻣해지고 식은땀이 났다. 손으로 땀을 훔치고는 누워서 따뜻한 진의 다리에 내 다리를 휘감았다. 이미 잠은 달아나 있었다. 나뭇가지에 걸린 비닐봉지. 입으로 되뇌며 떠올린다. 창으로 스며든 가로등 불빛이 웬일인지 이질적으로 낯설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