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8시쯤 되자 진이 들어왔다.
“잘 갔다 왔어? 늦잠 자서 아침도 못 차려줬네.”
내 말에 진이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을 보며 나는 점차 마음이 놓이고 있다. 겉옷을 안방에 걸어놓고 나와선 의자에 앉은 그는 피곤한 기색이 가득하다. 나는 그런 그의 긴 속눈썹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그의 머리칼을 어루만진다. 가늘고 얇은 머리칼이지만 부드럽다. 평소 나는 진의 머리칼을 만질 때마다 느껴지는 은근한 감촉을 좋아했다. 이제 저녁 먹어야지! 내가 말하며 부엌으로 가려 하자 그가 나를 붙잡았다.
“오늘 낮에 장인어른께 전화 왔었어.”
그의 목소리가 툭, 떨어졌다.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나는 의자를 끌어당겨 그의 앞에 앉았다. 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번 추석에 오냐고 물어보시던데….”
“당신은 어떡하고 싶은데?”
“갈 수야 있는데, 해야 할 일이 있기도 해.”
“회사?”
“응, 계속 프로그램 돌려봐야 해서. 당신 혼자서 갔다 올래?”
“아니.”
“안 가도 괜찮겠어?”
“할 수 없지 뭐. 엄마한텐 전화 안 왔어?”
“응.”
“자기 일 있어서 못 간다고 하면 되지 뭐. 이번 연휴는 우리끼리 쉬자.”
그의 머리를 다시 매만지며 나는 애써 활기차게 말한다. 실내 온도는 적당히 따뜻하고 우리의 대화는 아무 걱정 없다는 양 톡, 톡 가벼운 파장을 일으키며 스며드는데 마음속으로는 짜증이 치밀었다. 나는 부엌이 아니라 안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침대에 걸쳐 앉자 부드러운 진동이 엉덩이 주위로 느껴졌다. 잠시 생각에 잠겨 앉아있자니 곧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이 저녁밥을 차리는 모양이었다. 멍하니 닫힌 방문을 바라보던 나는 침대 위로 드러누웠다. 도대체 왜? 엄마는 그렇다 치더라도 아버지조차 내게 직접 연락하지 않고 진에게 전화를 거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젠 아버지도 나를 불편해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엄마하고 매일같이 붙어있다 보면 자연히 그렇게 될 것이라고는 진작부터 예상했었다. 그러나 여전히 심기가 불편했다. 이미 엄마와는 연락이 끊긴 지 오래되었다. 따라서 이젠 신경 쓸 여지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마저도 그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다시 두통이 밀려오는 것 같아 난 눈을 감았다. 머리를 비우기 위해 애쓰고 있던 와중 별안간 방문이 벌컥 열렸다. 그 문으로 진이 뛰어 들어왔다.
“여보! 그 소리가 또 들렸어!”
“뭐?”
“그 비닐봉지에서 나는 소리가 또 들렸다고!”
“…나 지금 머리 아파. 이따 얘기하자.”
진의 소리에 슬며시 눈을 떴다 감는데 갑자기 그가 내 어깨를 붙잡고 누워있는 나를 일으켰다. 손아귀 힘으로 그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잔뜩 예민하던 찰나에 나도 모르게 화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진은 훨씬 더 일그러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좀처럼 이런 표정을 짓지 않는다. 아니, 아예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나는 멍해졌다. 그는 지금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순식간에 집안 공기가 냉랭해졌다.
“소리가 안 들린다고? 이렇게 선명하게 들리는데! 웃음소리가 들리잖아! 여자 웃음소리가!”
진의 손아귀는 이제 내 어깨 부근을 꽉 누른 채 목까지 조이고 있었다. 나는 있는 힘껏 그를 밀쳐냈다. 여자 웃음소리? 그의 말을 듣고 나니 그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관자놀이에서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것을 느끼며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그의 말은 비닐봉지 안에서 여자 웃음소리가 들린다는 것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었다. 어느새 팔엔 소름이 돋았고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아파트 벽을 손으로 짚은 채 비닐봉지를 노려보았다.
쨍그랑, 쨍그랑!
기다렸다는 듯 바람에 흔들리며 비닐봉지 안에 있는 내용물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그렇지, 저기 저 안에 들어있는 건 음료수 캔이지 쥐나 고양이 따위가 아니다. 웃음소리는 무슨. 나도 모르게 숨을 내뱉으며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으아아아악!”
그때 집 안에서 자지러지는 진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소스라치게 놀라 빠르게 뛰던 심장이 이보다 더할 순 없을 것 같은 박자로 뛰기 시작했다. 다시 재빠르게 집으로 들어갔다. 거실에서 진이 머리칼을 움켜쥔 채 납작 엎드려 있었다. 진을 잡고 흔들었지만, 그는 여전히 머리를 움켜쥔 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만해, 그만해!”
그는 이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처음 보는 그의 모습에 놀란 나머지 그의 몸을 흔들 수조차 없었다. 눈앞에 있는 그가 내가 알던 진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에게 어떻게 해줘야 하는지를 몰라 나도 덜덜 떨고만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진이 비명을 멈추고 조용해졌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가까스로 손을 뻗어 진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니 그는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주 조금 용기가 생긴 나는 두 손으로 진의 얼굴을 내 눈높이까지 끌어올렸다. 그러자 아주 새빨개진 진의 눈이 보였다. 그는 울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처럼 내 몸도 마구 떨리고 있는 것을 진정시키기 힘들었다.
“여자가 계속 웃어. 근데 너무 낯익은 목소리야. 이젠 어떡하지?”
진은 계속해서 흐느꼈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등 뒤가 서늘하다. 진처럼 나도 내가 무서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그런데 이 두려움의 원인을 알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지금도 울고 있는 진을 앞에 두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조금 열린 베란다 창밖으로 쨍그랑쨍그랑, 깡통 부딪히는 소리만 미세하게 들려오는 걸 계속 듣고 있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