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의 시간이 스쳐 지나가다.
하루 종일 오가던 동네 언니들과의 단톡방에 내가 답이 없었던 날이다.
검사 결과지를 확인하고 남편과 한참을 울고 반쯤 나간 정신으로 아이들을 챙기느라 대화에 낄 수가 없었다.
따르르릉, 전화가 왔다.
“애들 챙기느라 많이 바빠? 답이 없길래 연락했어.” 가장 친했던 언니의 전화였다
그냥 밥 챙기느라 정신이 없다고 얼렁뚱땅 넘기려 했다.
언니는 목소리가 왜 그러냐고 검사 결과도 안 나왔는데 왜 벌써 목소리가 힘이 없냐며 괜찮을 거라고 나를 다독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서 “언니, 결과가 나왔어. 안 좋대요.”라고 말했다.
깜짝 놀란 언니는 무슨 검사 결과가 이렇게 빨리 나오냐고 잘못된 거 아니냐며 언니도 어쩔 줄 몰라했다.
혼자 애들 보기 힘들면 지금 자기 집으로 애들을 보내라고… 혼자 좀 쉬라고 했다.
난 마음만 받겠다고 전화를 끊었다.
며칠 후,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암 선고를 받고 오는 날이었다.
내가 병원에 간 사이 다른 언니들도 내 이야기를 알게 됐다.
병원에 다녀오니 "한국은 의술이 좋으니 가서 수술받고 오면 괜찮을 거야.” 하고 다들 위로해주었다.
언니들의 위로를 듣고 있는 이 상황이 너무 믿기지 않아 눈물이 주르르 흐르는데 언니들은 아무도 울지 않았다.
나와 함께 눈물을 흘리지 않는 대신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매일 아침마다 나를 불러냈다.
커피 마시고, 맛있는 점심 먹으며 끼니 거르지 말라고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혼자 있으면 우울한 생각만 더 많아진다고 수시로 연락했다.
짐 정리를 하면서 “내가 다시 중국에 오지 못 할 수도 있으니.. 이건 언니가 가져요.”라고 이야기하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며, 가을에 돌아와서 같이 커피 마시고 있을 테니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라며 무심한 듯 대답했다.
나중에 알았다.
언니들은 내가 없을 때 울었다는 것을.
내 앞에서는 입술을 깨물어가며 눈물을 참았다.
다 같이 울면 내가 정말 무너질까 봐 참았던 것이다.
같이 우는 대신 내 등짝을 때려가며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라고 나를 잡아줬다.
출국 날 아침 배웅하러 나온 언니들은 치료 잘 받고 오라고 날 안아주며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제야 언니들은 뒤돌아 눈물을 훔쳤다.
중국을 떠나기 며칠 전, 다른 지인은 나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수년 전 갑상선 수술을 먼저 한 선배이기도 한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나눠주면서
그동안 나에게 표현하지 못했던 애정을 듬뿍 담아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하고, 고마웠다며 말했다.
평소 말이 많지 않은 그녀였기에 흡사 사랑 고백을 받는 느낌이었다.
내가 아프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듣게 되는 며칠이었다.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이 내 가슴을 일렁이게 했다.
‘왜 하필 나인가’라는 원망이 사그라들자 이런 인연을 두고 떠나야 하는 아쉬움이 고개를 들었다.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창밖으로 지나는 풍경을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르겠구나.
풍경과 함께 이 인연들도 이곳에서 다시 함께 할 수 없겠다 싶은 생각에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4년의 시간이 눈물과 함께 스쳐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