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는 무엇인가?

세상을 보는 눈 다시 세팅하기

by 인류에 대한 기여

나는 무엇인가?

아침에 눈을 뜬다. 어제의 꿈이 생각난다.

구체적인 내용은 생각나지 않지만, 행복했던 꿈은 아닌 거 같다.

꿈은 왜 꾸는 것일까? 내가 생각하는 내 자아가 나도 모르는 나의 자아를 조정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장자의 나비꿈.

훨훨 날아가는 나비의 꿈을 꾼 장자. 내가 나비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나비가 나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나는 나의 삶을 살겠다고 하면서도, 실제는 영원하지 않은 삶에서 관망하는 태도로 살지 않았을까?

나를 찾기 위해 어떤 생각을 정리해야 할까?


“내가 삼십 년 전 참선하기 전에는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보았다가 나중에 선지식(善知識)을 친견(親見)하여 깨침에 들어서서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게 보았다. 지금 휴식처를 얻고 나니 옛날과 마찬가지로 산은 다만 산이요, 물은 다만 물로 보인다. 그대들이여, 이 세 가지 견해가 같으냐? 다르냐? 이것을 가려내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같은 경지에 있다고 인정하겠노라.”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중국에서 임제종(臨濟宗)을 개종한 임제의 후예 청원유신 선사의 말이다.



성철스님이 원용하면서 국내서도 유명해졌다. 이 말은 수도자가 작고 대수롭지 않게 득도했을 때는 물이 산으로 산은 물인 듯 혼란스럽지만, 득도하는 규모가 커지면 물은 물로 산은 산으로 보게 된다는 뜻이다. 즉, 외부 세계나 자연을 주관 작용과 독립해 존재한다고 관망하는 태도를 갖게 된다는 말과 같다.


어찌 지금은 산과 이 글을 쓰기 전의 산은 같은 산인가? 다른 산인가? 궁금할 따름이다.


1. 세상을 보는 시각을 다시 세팅하기.


나의 주인은 누구인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생각들/의식들이 나의 주인이 아니라면, 제약 사업에서 이야기하는 소위 과학에서 이야기하는 나의 DNA가 나의 주인(나는 나의 DNA 가 만든 AI 로봇일 뿐이다)일까?



나는 왜 만들어졌고 어떤 영향의 결과물인가?

시간의 영겁성, 그리고 무한성에 대해 고민한다.

인류 미래 예측/ 미래를 알 수 있다면?

지식이란 무엇이고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인가?

그 변화에서 어떤 것을 인지하고 준비해야 하는가?



나란 존재는 어디에 있을까?

위벽의 세포는 3일에 정말 교체된다. 백혈구는 10일마다 정말 교체되고, 뇌와 신경세포와 뼈는 7년, 마다 재생된다고 한다. 그럼 그 안에 있는 DNA 도 매번 재생이 된다는 것인데..

그 DNA는 무한 복제를 통해 자신을 유지하며, 생식을 통해 번성하고, 늙음과 죽음을 통해 소멸한다.

알고 있다. 인문학적인 나의 정의는 사회라는 그룹의 다른 사람들의 나에 대한 평가로 이루어지는 것이 맞다. 하지만 과학적인 내용의 너의 정의는 무엇인가? 10년 전의 세포와 지금의 나의 세포는 완전히 다른 세포다. 물론 DNA에 기록된 정보가 나의 존재를 기록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DNA 가 지도라면 그 지도를 만들고 이행하는 것은 세포가 아닌가? 최소한 DNA 가 지도고 행동 가고 만드는 자체라고 하더라도 DNA의 원천은 분명히 존재할 것이 아닌가?

나의 존재를 있게 한 부모님의 존재, 보모님의 부모님의 존재, 부모님의 부모님의 부모님의 존재….. 끝없이 나오면, 결국 유기물에서 합성된 세포…. 그러면 세포는 유기물에서 우연찮게 만들어진 세포셀에서 시작하는 것인데…



세포셀은 스스로의 DNA를 키우고 성장시킬 수 있다는 의미인가?

과학의 발전 = 1. 인간의 능력확장 2. 능력의 대체 3. 인간의 약점 해결 4. 무인화!

4차 산업 혁명, 많은 미디어나 언론에서 혁신과 파괴력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결국 4차 산업의 핵심 내용은 인력의 “투입 없이 대체할 수 있는 기술의 개발”이다.

현재의 인문학적 토대로는 결국 돈을 벌기 위한 기술 개발에 “무인화”라는 부분에 집중하는 4차 산업 혁명의 잘못된 길을 바로잡기는 어려워 보인다.

너의 생각인가? 아니면 너의 DNA 인가?

진화의 가능성/지속 가능성/그리고 개체(?)의 복사.

몸 안에 재활용 메커니즘,

굶주림과 단식을 활용하여 내부에 있는 쓰레기와 손상된 세포를 정화시킬 수 있다..

자가포식 : 세포가 일종의 재활용실을 가지고 있다(미소 좀) 넓거나 손상된 조직, 음식입자, 음식입자, 쓰레기를 재활용하여 세포질을 형성하여 분할한다.


확장

단순한 가정을 통해 몇 가지 사례를 만들어 보자


[사회적 관계 입장]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갔다. 나의 기억력과 신체적 능력은 동일하지만 과거의 나와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이동한 나는 같은 인물인가? 다른 인물인가?

내가 알고 있는 A는 사고로 인해 뇌를 다쳤고,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고 심지어는 기존의 능력도 상당 부분 불구가 되어 버린 상황이다. 그 A는 내가 알고 있는 A 일까?


[생물학적 DNA 입장]

눈부신 과학 기술의 발달로, 뇌 이식이 가능한 수준의 기술 발달이 이루어졌다. A의 뇌는 B라는 신체에 이식되었고, A의 몸은 재생불구의 사망상태이다. B의 신체에 이식되어 있는 A의 뇌는 A라고 정의 내려야 하나, B라고 정의해야 하나.

천재 과학자 A는 과학 분야에 놀라운 성과를 이루어낸 위대한 인물이다.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그의 뇌의 기능을 전자적인 장치에 업로드하는 것이 가능해져, 그는 기억력과 뇌 기능은 100% 기계를 통해 발휘되었다. 그 기계는 A인가?

영원한 삶은 나의 기억을 가지고 최대한 오랫동안 지금의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다만 생물학적으로는 그 기억 중에 나의 개인적인 삶의 기억은 포함되지 않는다..

결국에는 “시간” 만이 나의 측정기준이며, “지식” 만이 의미 있는 길이다.


판단을 시작하는 시작점

시간의 정의

완벽한 1초 : 세슘원자가 9,192,631,770번 진동하는 주기

우리가 “이일 초?라고 하는 말하는 1초도 사실은 1초가 아닐 수 있다.

나의 생각 또한 상대적이기 때문에 나의 1초는 나에게 조차 1초가 아닐 수 있다.

인간의 삶이란 것의 의미

Q1) 동물과 식물과 곤충의 가치는 상대적이고 절대적으로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 상대적인 가치는 차이가 매우 크게 나타남, 하지만 절대적인 가치는 모두가 평이(동등)함

Q2) 유기물과 무기물의 가치는 상대적이고 절대적으로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유기물과 무기물의

환경 대비 너무나 많은 개체의 번식은 내부 경쟁을 심화시켜, 생존에 불편을 줄 수 있다.

유기물에 축척되어 있는 DNA는 스스로 성장하는 것인가? 아니면 환경에 의해 성장되는 것인가?

4. 삶이라는 것의 의미

그냥 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새로운 것을 계속 시도해 봐야 한다는 것....

최소한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해야 한다는 것..

[존재의 핵심]

로고세러피에서는 책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행동 수칙을 요구하고 있다.

당신의 인생을 두 번째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당신은 첫 번째 인생을, 형편없이 행동함으로써 망쳐버렸는데, 이제 두 번째 인생을 살면서 지난번의 과오를 지금 막 다시 되풀이하려 하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행동하라.



과학적인 기반/미래 예측적

“휴먼 인터페이스”의 특징은 무엇인가?

“휴먼 being” 의 구성 요소는 무엇인가?

“ 현재의 기술/과학의 발전이 인간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현재 과학 기술은 우리 인간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고 있는가?

휴먼 인터페이스가 필요 없는 기술 : AI/자율주행/ 로봇틱스/ AR, VR, MR

휴먼 Being 이 필요 없는 기술 :블록체인

휴먼 인터페이스를 뛰어넘는 기술 : 시간제어, 의학제어

교육이나 인류가 “이념”으로 받아왔던 형태를 무너트릴 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변화할까?

나의 존재의 의미는 무엇일까?



2. 어디에 의미를 두고 살아야 하는가?


개인이 선호되기보다는 집단이, 집단의 선호가 더 우위에 있다.

이 이야기의 주체 “인류”는 내가 아니고 당신도 아니다. 그냥 지구에서 살아가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정신적인 집합체이다. 내가 잘되고, 안되고, 나의 나라가 잘되고 안되고는 여기에서는 의미가 없다.

(물론 인류가 상당 부분의 비율로 내리는 비정상적인 결정을 내리는 이유는 이런 내부의 이유가 깊게 존재한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이 내용은 기존의 학문을 정리하는 정도에서 넘어간다. )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 나오는 멸종은 현재의 올가닉 형태의 인류가 계속 존재할 수 없다는 이야기 하는 것이지, 인류의 유산이 흔적조차 없어진다는 것은 아니다. 어떤 형태로든 인류의 발자취는 남을 것이다.

기술 발전의 최고의 장애 요소는 바로 휴먼 인터페이스이다

지식을 기록한 후 지금까지의 인류의 집중적인 성장 기간이라고 여겨지는 약 2000년의 기간 동안 과학은 전형적인 특징인 휴먼 인터페이스의 활용성을 극대화하는 기술로 발전했고 이런 기술은 이미 적용이 대부분 완료되었고, 현재 신 과학 기술을 적용하는 것에 가장 큰 장애물처럼 다가오고 있다.

과학 기술 발전의 모토가 적은 노력으로 더 큰 효과/보상을 가지고 오는 것에 집중해 왔다면, (더 빠르게, 더 싸게, 더 효율적으로) 현재는 이런 효율성과 이익을 가지고 어떤 것을 “추구” 해야 하는 가에 대한 논지가 필요한 시점에 다다랐지만, 아무도 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3. 한계에 대해


왜 그럴까? 그것은 휴먼 인터페이스의 한계성 때문 아닐까? 우리는 우리의 존재 자체를 완전히 뒤집을수 있는 모든 가변적인 환경에서 살고 있다.


1-1. 우주에 인간 이외의 고도 문명을 이룩한 지식체가 있을까?라는 질문은 항상 SF의 가장 첨예한 주제임과 동시에, 과학의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다.


이 주제에 대한 답은 못 찾았지만(혹은 찾았는데 숨기고 있거나) 가정상에서 빠지지 않는 2가지 전재가 있다.

이 넓은 우주를 인간만이 고도 문명을 창출할 수 있는 존재일리는 없다.

인간의 인터페이스로 갈 수 있는 거리에 고도 문명을 창출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그리고 점점 인지력과 기술이 발전하면서 다음의 가정을 계속적으로 설립하고 발전시키고 있다.

우선은 지구 밖을 벗어날 수 있는 환경 극복 기술이 필요하다.

물과 산소에 의존하는 존재가 아닌 다른 형태의 존재로 지적 생물체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이를 현재의 인간 휴먼 인터페이스로 극복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1-2. 속도에 대해


디젤 엔진이 시속 100KM의 속도에 다다른 것이 이미 1차 세계대전 때였다.

기술 발전의 속도라면 현재는 시속 600KM 이상이나, 혹은 날아다녀야 하는 것이 맞지만, 현재도 휴먼 인터페이스가 감당할 수 있는 속도는 120 KM 정도이다.

속도에 대한 니즈가 사라진(휴먼 인터페이스가 감당하지 못하는 영역에 접어든) 진보된 사회에서는 2가지 방향에 대한 발전 접근이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사람이 없이 진행할 수 있는 자율 주행 혹은 사람 자체의 인터페이스를 대신할 수 있는 기술들(로보틱스, AR, VR), 궁극적으로 사람의 인터페이스를 더 강하고 내구성 있도록 개선하는 방법을 연구하게 될 것이다.(휴머노이드, 생물학적 강화, 각종 강화 슈트)


1-3. 생존 가능한 지속성에 대해 (연속 가능한 에너지 사용에 대해)


인류가 에너지를 얼마나 써야지 적정선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그 적정량에 대한 절대 값은 존재하지 않지만, 이를 평가하기 위한 조건으로, 지구의 순환 시스템이 버틸 수 있는 정도의 지속성에 대한 기준을 언급한다. 우선 지구가 순환시킬 수 있는 양 이상의 에너지와 오염 물질을 배출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에너지의 사이클과 이를 지속적으로 순환시킬 수 있는 환경 보고(유지)가 가장 중요하다. 어떻게 연속 가능한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의 무제한적 욕망에 의거한 인류의 욕심을 정치, 문화라는 인류의 기존 시스템적으로 극복하기는 지금까지의 역사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이르기에 충분한 데이터를 제공하고 있으며, 이를 강압적으로 제어해야 하는 방법을 연구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하지만 무서운 점은, 그 부분에 가장 핵심적인 사상은 기존에 휴먼 인터페이스를 뛰어넘는 단계를 지향하는 것이고, 이는 결국 휴먼 인터페이스가 필요 없어도 되라는 시기가 올 것이라는 것이며, 심지어 이런 내용은 의도적으로 언급되지 않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미 “휴먼 Being” 자체도 같은 “휴먼 인터페이스”를 경쟁이나, 피하고 싶은, 혹은 불 필요 한 것으로 인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휴먼 Being 이 없어도 기본 생활이 보장되는 딜레마를 가지고 있는 삶을 이미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1-4. (기본적인 생존이 완료된 이후에) 인류가 원하는 미래 기술

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의 이슈라는 걸… 우선 먹을 것을 찾을 것이고, 그리고 나의 생존을 보장해 줄 거류지와 사회 시스템을 원할 것이다. 역사가 이를 증명했고 이는 그냥 Fact이다.

그럼 이 부분이 상당 부분 해결된 이후에는 그다음에는 원하는 것이 뭐지?


4. 영생의 의미

인류의 기록을 정확하게 얼마동안 보관 및 전달이 가능할까?

구전이나, 전설이라는 형태(내가 해석하기 나름)가 아니라 정확하게 작성자에 의해 기록된 기록은 얼마나 오랫동안 보전 될 수 있을까?

인류 최고(古)의 문서 중에 하나인 성경조차 그 내용의 대부분은 이미 다른 이유와 다른 작자들에 의해 내용이 변경된 것이 아니었던가?

진정한 영생은 최대한 오랫동안 진보를 위한 최대의 경험치를 받는 것이다.

아무 목적이 없이 영원히 사는 것은 저주라는 것(일 것이라는 것)에 대해 대부분은 동의할 것이다.

영생 : 시간제어 기술(세포재생/기억력 저장/ 동일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는 나의 복제 기술)

기억을 보존하고 전파시키는 것에 방법을 찾는다면 그게 더 대단한 거 아니야?

하지만 영생을 위한 선택은 필연적으로 많은 대가를 요구할 수 있다. 인간의 속성 때문에..


1. “영생”과 “생존” 의 이중성적인 대치


일단 과학의 한계성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우리가 보고 관찰하고,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을 우리는 과학이라고 한다.

그 부분을 뛰어넘으면, 전설이나, 종교나, 아니면 믿음이라는 형태로, 혹은 무관심으로 표현된다.

현재까지 인류가 가장 크게 관심을 보이고 있는 분야는 생존(thrive)이었고, 다행스럽게도 2020년의 현재 문명의 가장 큰 특징은 이런 가장 중요한 관심사인 생존에서 그나마 가장 멀러 진 시대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환경에서 시각에서 삶을 바라보는 것이 모든 현상의 시작이었으며, 이를 뛰어넘어, “지구적인, 세포적인 시각에서 삶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2. 인간의 존재의 의미는 무엇일까? -인간조차 3대 이후의 연속성에 관심이 없다


:미세먼지/ 공기 오염/ 식수의 부족 등의 문제점을 이야기하지 않는 적이 없지만, 실제적으로 나의 작은 환경에서, 나의 연속성이 보장되고 있다면, 이는 우선적으로 관심사가 아니다.

이런 시점에서 인간은 좁은 환경에서의 3 정정도의 연속성만을 보고 살고 있는, 하지만 언젠가는 끝날 시기가 올 수도 있다는 불안함과의 동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재의 나와 나의 관계 족속만 살아남으면 된다


3. 인간은 착각한다. 뇌가 환경을 파악하고 조정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적으로 뇌도 세포가 시키는 업무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중앙 조직화된 통제기관일 뿐 나의 주인은 아니다.

통계학적으로, 혹은 분명히 생존환경이 높은 상황을 선택하지 않는 소위 비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것을 보면 뇌가 시키는 것이 아니라 호르몬이 시키는 것이라는 반증이다.

모든 생명체의 주인은 세포 그리고 세포의 목적은 영속성이다.

영속 자체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세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생식과 후손을 통해서 정보와 나의 유전 정보를 계속 존속시키려고 한다.

결론적으로 죽음을 결정하는 것은 “유전자”다. 우리의 유전자는 매우 이기적이다.

생명체의 시선에서 보면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지만, 75% 의 유전자를 공유하는 방향이 자신의 지식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나보다는 조직, 우리에 헌신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지 않은가?

우리의 삶의 목적과 의미는 없다. 역설적으로 목적과 의미가 없으면 어떤 것도 목적과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영생을 원하는 것처럼 말하고 다니면서도 현재에만을 만족하면서 사는 역설적인 존재다.


(1) 자리에 집착하는 이유가 있다.


내가 아니라 내 자리가 나를 평가하게 만든 중요한 요소이다. 사회적 자리, 사회 평판, 그리고 뭐 하는 사람인지를 정의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자리가 끝나면 나에 대한 평가는 다시 원점으로 회귀하게 되는 것이 확실하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본인이 변한 척 연극하는 행동을 해도 남들은 그렇게 기억하지 않는다.


* 나의 자리를 버리고 자연인으로 회귀할 수 있는가?

너는 그럴 수 있니?..... 자식들이 있는 사람들이 그럴 수 있니?



“Δεν ελπίζω τίποτα. Δε φοβούμαι τίποτα. Είμαι λέφτερος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


(2) 역시나 경제적 자유도


역시나 평판 다음에는 경제적 자유도가 가장 중요하다. 자유도를 높이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야 할 요소이다.

단순하게 돈을 많이 버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경제 활동 없이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가?

사애적으로 돈을 많이 버는 것 같아 보이는 가정이 오히려 더욱 경제적 자립도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물건이나 돈이 아니라, 물건이나 돈으로 실현하는 경험이다.


충분함이라는 교훈, 다시 말해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고 나면 무엇이든 더 많이 가질수록 돌아오는 보상을 줄어드는 경향은 확실하다.(물론 기본적인 욕구가 어디까지 인지도 현재는 불확실하다.)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에서는> "부유함은 소유가 아니라, 사용에 달려 있다"라고 주장했다.

만족스러운 삶에 부합하는 가치와 목적, 그리고 현재의 선택과 욕구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경제적 자유도 다음에 나는 경제적 사용 방법에 대해 고민하리라.


(3) 남들에 의한 평가


가족이 왜 필요한가? 친구가 왜 필요한가? 그들에게 나는 이미 보편적인 관계의 틀 안에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나는 아들이고 남편이고 아빠고 그리고 동창이고 선후배고 동료이고 후임이면서 보스다.


사회적 관계망에서 남들에 의해 평가받는 나의 모습은 아무도 그러하다고 이야기하지 않지만 정말 중요하게 평가받는 요소이다. 남들에 의한 평가를 위해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를 포함 내 주변의 대부분이 그렇다.




5. 기존에 철학/ 사상이라 불렸던 지식의 존재가 이런 한계를 대체할 수 있을까?


지식의 의미는 대단한 것인가? 오랫동안 체험과 연구, 명상을 통해 깨달은 누적물들은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

우선 좋은 것이란 무엇인지부터 살펴봐야 한다.

인간은 날 때부터 선할까? 아니면 백지로 태어난 후 선함은 오로지 배움과 훈련을 통해서만 발전시킬 수 있는가?



비트켄 슈타인 : 논리 철학 논고

1) 세계는 일어나는 일들의 총체이다.

2) 일어나는 일, 즉 사실은 사태들의 존립이다.

3) 사실들의 논리적 그림이 사고다.

4) 사고는 뜻을 지닌 명제이다.

5) 명제는 요소 명제들의 진리 함수이다. (요소 명제는 자기 자신의 진리 함수이다.)

6) 진리 함수의 일반적 형식은 [ p, ξ , N( ξ ) ]이다. 이것이 명제의 일반적 형식이다.

7)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논고를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핵심적 물음 4가지

(Ⅰ) 말할 수 있는 것(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Ⅱ) 어떻게 명제는 뜻을 지닐 수 있는가?

(Ⅲ) 왜 어떤 명제는 뜻있는 명제와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뜻을 지니지

않는가?

(Ⅳ) 왜 요소 명제들의 진리 함수가 아닌 명제들은 뜻을 지니지 않는

가? 또한 이 명제들의 성격이 상이할 수 있다면 어떻게 상이한가?

비트겐슈타인.jpg





6. 결론. 오늘을 살아라.


세상이라는 무대, 사무의 쓶임없이 변화하는 해안성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나는 사물이 가지고 있는 허구의 성질을, 현실의 모든면을 즐기오 있는 위조된 높은 명망을 확신하게 된다. 이런 관찰을 하다 보면 아마도 모든 사색가들이 경험하듯이, 인습과 유행, 문명과 진보의 복잡한 진행, 문화의 거창한 뒤엉킴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모두는 산화처럼 보일수도 있다. 하지만 꿈의 허구처럼 보일수도 있다.


사물의 공허를 깨달은 순간, 부처는 황홀경에 휩싸여 말했다. "나는 모든 것을 안다."

"나는 모든 것이었다. 그 무엇도 수고할 가치가 없었노라"



나처럼 살기


나중에 이 글을 내가 다시 보게 되면, 지금의 나의 생각이 그때의 나의 생각과 동일할까?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지금의 생각이 그때도 그러한지에 대해서는 정말 연구하고 추적해 보겠다.


결국에 본인의 삶이 라이프 사이클/스타일/ 패턴을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 어느 정도의 인간적인 유대감을 가지고 있으면 만족하겠는가?

* 어느 정도의 사회적 명성을 가지고 있으면 만족하겠는가?

* 어느 정도의 경제적 자유도를 가지고 있으면 만족하겠는가?


삶이 영원하지 않은 것을 아아버린 시점에서 나는 다시 어떤 내가 되어야 할지 스스로를 정의 내리고 만들어야 한다. 웃기지 않은가? 나는 이미 만들어진 것인가? 아니면 내가 스스로를 만들어야 하는 존재인가?


1. 인간관계도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리하여지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너무 잦은 만남은 불필요하다. 잦은 만남은 내가 매우 불필요한 사람인 듯 잉여 인간처럼 남들에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본다.


- 주변사람들에게 너무 마음 쓰지 말자. 어차피 이어질 인연은 이어지고 만나서 부딪치는 인연은 부딪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예의 있게 사람을 대하는 생활 자세는 언제나 잊지 말고 유지하자

- 인연이 생각보다 자유롭게 이어지지는 않는다. 특히 앞으로의 시대는 점점 더 그러할 것이다.

인연을 매기 위해서는 본인의 마음 씀씀이가 필요하다. 몇 번은 상처받을 마음, 그리고 계속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 의지... 마음...



2. 인류에 대한 기여


별로 친하지는 않았지만 친해지고 싶었던 인원이 했던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돈을 많이 벌려는 이유는, 남을 돕고 싶어서라고... 인류에 대한 기여가 작은 일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절대 큰일도 아님을 확신한다.


그래도 살아가는 삶이 아무 의미가 없다면 정말 비참하지 않을까? 인류에 대한 기여를 하자. 혹은 후세에 내 자식에게 자랑스러운 나의 흔적을 남기도록 하자.


어떠한 형태로든 생존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이다.

허무주의든지, 아나키스트적인 사고던지, 평화주의자든지, 과학자든지 상관없이 살아 있는 것이 그 의미다.

열심히 노력하고 잘 사는 것도 의미가 없다. 그냥 잘 자.


최초 기록 24.3.1 / 업데이트 25.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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