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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음의태양 Jan 05. 2021

친애하는 친구 P.

보고싶다 친구야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을 같이 한 친구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혈육 같은 크기의 무게감일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P와 나는 잘 알지 못했다. 단지 그는 6반 반장, 나는 9반 반장 정도로만 아는 정도였었다.

같은 중학교에 다니면서도 같은 반이었던 적이 없던 우리는, 둘 다 성적이 상위권이었던 탓에, 수준별 수업을 하는 학원에서 같은 반을 수강하게 되면서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 배정을 소위 ‘뺑뺑이’로 배정받던 시절에 나는 집 근처의 고등학교에 배정받지 못했다. 반에서 대다수의 아이들이 근처 두 개의 고등학교에 배정받았지만, 나는 차로 30분이나 이동해야 하는 고등학교를 반에서 혼자 배정받게 되었다. 한참 심란한 마음에 침울할 때, 나는 P가 그의 반에서 유일하게 그 고등학교에 배정받게 된 소식을 들었다.

이렇게 우리는 고교시절도 다시 동창이 된 것이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같이 도서관을 다니며 공부하던 친구들 사이에는 항상 P가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고교시절에도 같이 어울리며, 공부를 했다.

이상했던 건 고교시절에도 그와 나는 같은 반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1학년 때 다른 반으로 배정받고, 2학년부터는 나는 문과반으로, 그는 이과반으로 진학하게 되었다. 


수능을 망치다 시피하고, 대학별 고사를 준비하고 있을 때, 나는 그와 같은 한 장의 원서를 같은 대학에 넣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 나의 합격 소식을 듣고, 내가 제일 먼저 전화해서 합격여부를 물어봤던 것이 바로 친구 P였다. 

지방의 고등학교를 졸업한 우리는 그렇게 같은 대학에 입학을 했고, 하숙집의 룸메이트가 되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익숙해질 무렵,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P는 입대를 하기로 했다. 그때 마침 친했던 친구들이 대부분 군입대를 계획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왠지 모르게 이제는 그 친구들 없이도 객지 생활을 해야 된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이라면 매우 우습지만, 그때는 꽤 비중 있게, 진지하게, 앞으로는 혼자 지내는 법도 터득을 해야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룸메이트였던 그 친구의 부재가 나에게는 가장 큰 부담감으로 작용했던 것은 맞는 것 같다. 


그래서 결국 나는 여름방학에 일주일간을 할머니께서 다니던 절에 머무르는 방법을 선택하게 되었다. 혼자 지내는 법을 터득하고 익숙해지기 위해서라는 명목이었다. 

옷 몇 가지와 책 몇 권을 가지고 산속의 절에서 지내며, 새벽에 일어나 사찰의 청소를 하고 낮에는 책을 읽으며 지냈었다.

일주일 후, 산을 내려와서 내가 제일 먼저 했던 건, 믹스 커피 몇 잔을 연거푸 마시고, 삼겹살을 사서 집에 들어갔던 것으로 보면 나는 그 혼자만의 세상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던 것 같다. 


걱정과는 다르게 그 친구가 없는 다음 학기의 대학생활은 다른 친구들로 채워졌고, 고등학교 동문회장이었던 그 친구를 대신해 졸업 선배 초청행사를 무사히 마치게 되었다. 그렇게 한 학기를 마치고 나도 군입대를 준비했다. 


복학을 한 이후에도 줄곧 그 P와는 룸메이트로 지내게 되었고, 하숙집과 도서관을 서로 오가며 열심히 생활하였다. 그 사이 생긴 그의 여자 친구는 이제는 그 친구의 아내가 되었는데, 나이가 같았던 우리는 서로 공유할 만한 일들을 많이 쌓을 만큼 친하게 지냈다. 

대학을 같은 해에 졸업한 우리는, 다른 곳에 취업을 하게 되며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물론 사회초년생 시절에도, 서로의 결혼 전후에도, 우리는 종종 만나 술을 진하게 먹는 사이였다. 


P는 오래도록 나의 좋은 파트너였다. 

학창 시절의 선의의 경쟁자, 가족과 다름없는 벗, 어두운 밤 도서관에서 같이 내려오던 동반자, 이른 새벽같이 하숙집을 걸어 나오던 동료, 가끔은 술기운에 서로 주먹다짐 후 화해하는 동지. 등의 여러 개의 수식어가 붙을 만큼의 가족 이상의 관계였던 것이다. 


그는 항상 품이 넓었다. 기꺼이 친구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나눌 줄 알고, 가끔 귀찮을 정도로 나와 다른 친구들의 안부를 묻고 챙겼다. 같이 여행하거나 만날 때에는 기꺼이 나보다 크게 지갑을 열어 너그러운 웃음을 선사했다. 


지금은 서로 슬하에 두 아들이 있고, 각자의 생활에 매우 치여서 그를 만나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그 친구 가족과 우리 가족과의 모임에서는 P와 그의 아내 그리고 내가 유독 서로 친하여, 아내에게 종종 소외감과 불편함을 주었던 상황이 펼쳐지기도 했다. 내가 부족한 탓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많이 자주 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오늘도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허공에 물으며, 기약 없는 약속을 주고받는다.


“야, 언제 한번 고기 한번 구우러 가자”
“알았다. 한번 보자”

(사진 출처 : https://pixabay.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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