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들의 입만 쳐다보고 있는 레거시 미디어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파악하지 못한 대통령 윤석열 씨의 담화문은 당당하다. “의료계가 증원 규모를 2천 명에서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려면, 집단행동이 아니라, 확실한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통일된 안을 정부에 제시해야 마땅합니다. 더 타당하고 합리적인 방안을 가져온다면, 얼마든지 논의할 수 있습니다. 정부의 정책은 늘 열려있는 법입니다. 더 좋은 의견과 합리적 근거가 제시된다면 정부 정책은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논리와 근거 없이 힘으로 부딪혀서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시도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국가 내에서 가장 강력한 힘, 행정부를 컨트롤하면서 힘에 의해 모든 것을 변경시키려고 하는 집단은 명백히 정부 쪽이다. 그리고 행정부가 하고 있는 증원 또한 제대로 된 논리와 근거가 없다. 법원에서 이를 물어왔으나, 제대로 된 근거를 전달한 바가 없다. 의협 또한 제대로 된 논리와 근거가 없기는 매한가지다. 그러나 의협이 비논리적이라고 해서 정부가 논리적인 해법을 제시하는 건 아니다. 구조적인 모순을 발견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쪽이 합리적인 것이다.
어느 쪽도 합리적인 의견을 제시하고 있지 못하지만, 정치권은 당당하다. 이 일에는 여권과 야권이 없다. 의대 정원을 늘려야 한다는 데에만 입을 모아 찬성하면서도, 어떠한 방식으로 어떻게 늘려야 한다는 논의는 빠져 있다. 오늘날 한국의 여러 어젠다들은 이런 방식으로 처리되고 있다. 원론적인 이야기만 반복할 뿐 제대로 된 정책적 해법을 제시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러한 현상은 문제의 본질이 무엇일지 숙고해보려는 노력은 배제한 채 그저 정치인의 입만 바라보고 이에 대해 보도하는 것을 반복해온 레거시 미디어의 영향을 배제할 수는 없다. 한국의 9시 뉴스의 패턴은 뻔하다. 오늘 대통령은 어떤 말을 했고, 이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오늘 여당 대표는 어떤 말을 했고, 이에 대해서 다른 사람의 의견은 어떤지. 오늘 야당 대표는 어떤 말을 했고, 이에 관한 다른 사람의 생각은 어떤지. 결국 정치인의 입에만 의존해서 세상을 바라보려는 시도일 뿐이다.
그러나 세상의 문제는 이제 단순하지가 않다. 오늘날 해당 영역에서 볼 수 있는 구조적 모순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해당 분야를 깊이 있게 공부한 전문가의 말을 유심히 들어야 한다. 레거시 미디어들의 보도를 계속 들어도 문제가 생겨나게 하는 핵심적인 구조적 모순이 무엇인지를 먼저 찾아보는 노력이 그리 많다고 보기는 어렵다. 정치인의 입, 그리고 이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사실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부차적인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구조적인 모순의 지점이고, 그것에 대한 개혁이다.
언론이 정치인의 입만 바라보는 보도의 방식을 유지하면서, 정치인들은 오만과 독선에 빠지게 되었다. 사회 전체가 행정부의 늘공들이 사태를 간단히 해결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수법을 두고 사회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 국가의 정치지도자들이 대통령 윤석열 씨처럼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합리적인 사람인 양, 그리고 무엇이 가장 합리적인 방안인지 판단할 수 있는 주체가 정부인 양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회과학 연구자로써 공부를 하면서 느끼게 된 것은 세상의 모든 문제는 정말 복잡하며, 가장 합리적인 해결 방안은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개인 의견만 어느 정도 가질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대통령 윤석열 씨는 그런 고민이 없기에 이토록 당당한 것이다. 정치인의 입만 바라보고, 정치인의 말에 대한 논평하는 것을 중심으로 방송을 진행하는 지금의 레거시 미디어는 문제가 많다. 언론 환경이 정치인들이 구조적 모순에 대한 해법을 고민하지 않아도 되도록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 본 글은 얼룩소(alook.so)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인 에어북으로 공모하려 했다가, 현재 에어북 공모를 운영중이지 않은 관계로 브런치북으로 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브런치스토리와 얼룩소 사이트에 동시에 올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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