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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준경 Sep 13. 2024

아버지와의 대화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네 할아버지가 연말 때쯤에 학교로 오시게 되었지. 내 아버지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단다. 원래는 내 엄마도 오시기로 했었는데, 우울증이 심해지셔서 입원하게 되셨단다. 아버지는 그래도 이전보단 낫다고 말하셨지. 이제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있으니까 훨씬 살 것 같다고 말하셨어.

내가 그때 같은 수업을 들었던 존에게 차를 빌려서 아버지를 말리부 해변으로 모시고 갔단다. 우리는 김밥을 싸들고서 돗자리를 깔고 해변가에 둘이 앉았지. 콜라를 한 캔씩 마셨단다. 톡 쏘는 콜라를 마시고 바다에 파도가 치는 걸 보니 기분이 좋더구나. 아버지께 말했지.

“아버지, 이번 학기 과제에 아버지가 예전에 했던 질문을 가지고 A+를 맞았어요.”

“어떤 질문 말이가?”

아버지는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말하셨지. 아버지의 의미심장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던 나로서는 아버지가 일부러 모른 체하시는 거라고 생각했지.

“사실과 진실의 차이가 뭔지에 관해서 말이에요.”

“내가 그런 질문도 했드나? 진실은 사회적 의미를 획득한 사실이 진실 아이가?”

갑자기 머리가 멍해졌단다. 그래서 아버지께 진실은 개인적인 것이며 한 개인의 마음을 건드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했지. 아버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아, 너는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하고 넘기셨단다. 그리고서는 삼촌들 흉을 보기 시작했지.

방송국에 남아 승진을 했었던 삼촌이 결국에는 방송국 사장으로까지 승진을 했다고 하셨지. 그리고 방송국에서 짤려 유튜브를 시작한 삼촌도 엄청난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버가 되었단다. 그런데 방송국 사장 삼촌이 사장이 되고 난 후에 바꾸었던 프로그램들과 패널들이 유튜브를 하는 삼촌 마음에 안 들었나봐. 그랬더니 어느 날엔가 유튜버 삼촌이 라이브를 켜고서는 예전에 나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의 일을 언급하며 방송국 사장 삼촌을 욕했다고 하시더구나. 그랬더니 방송국 사장 삼촌은 자신은 입 다물고 있으면서 방송국 직원들에게 해명 방송을 하게 했지. 유튜버 삼촌이 오히려 나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잘 못 모셨다고 말하게 했다고 해서 한 일주일간은 설왕설래했대. 어떤 신문기자가 아버지가 근무하시는 아파트를 찾아와서 아버지께 직접 질문까지 했다고 하시더구나. 그래서 아무 말도 안 해주고 돌려보냈다고. 그런 일이 있면 나한테 말했어야지 왜 아무 말 안 했느냐 했더니 아버지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셨단다.

“아이고, 공부하는 아 심란하게 와 그런 걸 다 말하노? 고마 별일 아니구마.”

“그런데 어떤 쪽 삼촌 말이 맞는 거에요?”

“참나, 지들이 운제 어무이, 아부지 챙겼다꼬? 내사 고등학교 졸업하고부터는 어무이, 아부지 대소사는 내가 다 챙겼구마이. 하여간에 다들 염치가 읎어. 내 뭐 할라꼬 피땀 흘려서 고놈들 대학 학비 보태줬는지, 참말로.”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는 웃어넘기셨지. 그러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한 마디를 하시더구나.

“내가 그때 니 말 듣고, 확장 공사 안 하고 대학가로 쪽으로 가게를 옮겼시믄, 미지 갸도 아직 살아있고, 느그 엄마도 건강하려나…….”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단다. 내가 대학가로 가게를 옮기자고 했었던 일이 기억에 남지 않아서였지.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만 해도 아직 가게가 잘 운영되던 때였단다. 그때 치즈 닭갈비 같은 새로운 조리법이 등장하긴 했어도, 기존의 가게를 찾는 젊은 손님들도 많이 있을 때였어. 우리 가게도 아직 손님이 많이 찾을 때였단다. 그때 그래서 한 번 확장 공사를 했었어. 나도 기억 못 했는데, 그때 내가 아버지더러 그 돈 주고 차라리 대학가 쪽으로 가게를 옮기고 치즈 닭갈비 같은 새로운 메뉴를 도전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말했다고 했다더구나. 난 정말 지나가는 말로 한 것 같은데, 아버지는 한참을 고민하셨나봐.

“그때만 해도 내 대학생이라꼬는 느그 삼촌들바께 몰랐던 때니께, 고마, 고졸이 거서 장사하면 으레히 약간 무시 당할끼라, 그리 생각했대이. 그런데, 우리 아들이랑 미지처럼 좋은 학교 댕겨도, 이래 엄마랑 아부지 말도 잘 들어주는 대학생이 있는지 우예 알았노. 그런 줄 알았시믄 고마 대학 앞에서 장사도 해보고 해싰낀데……. 고마 이리 되삤다…….”

그 말을 듣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그것과 미지의 자살이 무슨 관련이 있는지 물었단다. 그러자 아버지는 엉엉 울면서 말씀하셨지.

“내 가게만 계속 잘 되었시믄, 미지 갸가 미래 걱정이고 안 했을 거 아이가? 남자친구랑 헤어져서 많이 힘들었시믄, 고마 휴학하고 내려왔시믄 됐을낀데……. 내사 멍청해가이고, 괜히 원래 하던 동네에서 장사하려다가 가세가 기우니까, 갸가 하루라도 빨리 취직할라 카니까, 그러니까 이래 된 거 아이가? 고마, 그러지만 않았시도, 미국 유학 온다 칼 때, 단칼에 안 된다하지 않았싰긴데…….”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었단다. 나의 유학을 결정 짓던 날, 미지의 죽음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건 미지의 유서 내용을 알고 있던 나뿐이었던 거지. 그때마저도 나는 내 책임을 인정하는 것 같아 무서워서 유서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그러나 말리부에서 아버지의 자책을 마주한 날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고 생각했단다. 미지의 죽음에 얽힌 진실들을 말하겠다고 결심하기까지 한숨 한숨 들이키고 내쉬기가 힘들었지. 어느샌가 아버지는 바닥에 엎드려 울고 계셨단다.

아버지를 일으켜 세우고, 내가 기억하는 유서의 내용을 모두 말해드렸지. 전 남자친구와 헤어지던 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 이후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 유서를 본 날, 수십 번도 더 읽었고, 그 이후로도 계속 부모님 몰래 간직하며 읽고 또 읽었던 터라 모든 내용을 거의 다 기억하고 있었단다. 이제는 많이 기억나진 않는구나.

“그 유서는 지금 오데 있노?”

아버지는 유서의 모든 내용을 듣더니 깜짝 놀라 말씀하셨단다.

“본가에 있는 제방 둘째 서랍에 있어요. 죄송해요. 그 말씀을 드리면, 제가 여동생을 돌보지 못한 것 같아서, 그래서 무서워서 말씀을 못 드렸어요.”

아버지는 한참 동안 말이 없으셨단다. 그러는 동안 파도는 계속 쳤지. 파도치는 소리마저 고마울 정도로 야속한 침묵이 계속되었단다.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조용히 앉아서 바다만 봤어. 그러다가 해가 질 때쯤에 아버지가 말씀하셨단다.

“괜찮다. 니 잘못 아이다. 니도 직장 다니느라 바빴싰긴데, 우예 여동생 일 다 하나하나 물어보긋노? 아가 아부지한테 전화했을 때, 뭔 일 났구나 하고 내가 전화해서 여러 번 물었어야 했는데, 내가, 내가, 우리 금쪽같고 순한 우리 자식들, 똑똑한 우리 자식들, 간섭 안 하고 하고잡은 대로 하게 하고 싶어서. 그래서 네 엄마한테도 말도 안 하고, 나 혼자 문자만 하다가 그리 됐구만.”

“아버지, 우리 이제 각자 자기 탓하는 거 그만 해요. 아버지도 식당 일 바쁜데 문자라도 하신 거잖아요.”

그리고 우리는 부둥켜안고 울었단다. 한참을 울었지. 해가 다 지고 깜깜해져서야 우리는 차로 돌아가 다시 학교 기숙사로 돌아왔단다. 그리고 다음 날 아버지를 공항으로 모셔다드렸지. 아버지는 한층 더 밝아져 보였단다. 그날 아버지의 모습이 편안해 보여서 다행이었지. 그게 내가 아버지를 실제로 본 마지막 기억이니까.

아버지는 한국에 돌아가셔서 집에서 미지의 유서를 찾아내고서는 경찰에 신고하셨단다. 전 남자친구는 이미 다른 범죄로 감옥에 있던 중이었단다. 대략 반년이 지나고서는 모든 절차를 마치고, 형량이 늘어났지. 어차피 곧 모두가 죽어 의미 없는 일이긴 했지만 말이다. 신고가 접수되고, 통화기록 조회, 이메일 조회 등으로 미지의 전 남자친구가 미지를 괴롭힌 것이 인정되고 검사가 기소하자, 엄마의 병에도 어느 정도 차도가 있었단다. 엄마는 통화로 이런 걸 왜 숨겨놨냐고 한동안 야단을 치셨지만, 나중에는 그래도 보관해놓고 지금이라도 말해줘서 고맙다고 말씀하셨지. 그렇게 겨울방학은 지나갔어.     

아버지가 한국으로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하셨던 말씀을 곱씹어보았단다. 왜 식당을 옮길까 생각했었는데 못 옮겼다고 말씀하셨을까? 왜 그 말을 하기 전에 삼촌들 욕부터 하셨을까? 과연 식당을 옮겼다면 아버지의 닭갈비 장사가 그 시기까지도 성행하고 있었을까? 그러고서는 생각했지. 아버지가 이전에 대학가로 옮겨 닭갈비 장사를 계속하셨더라도 지금까지 성업 중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고.

그 당시 20대 초반의 대학생들이 소비에서 원하는 서비스 품질은 점점 높아지고만 있었거든. 한국이 국민소득이 1만 달러를 달성했던 것은 1990년대였고, 나처럼 그 시절에 태어난 세대들, 그리고 그 이후에 태어난 세대들은 점점 더 높은 수준의 서비스 품질을 요구했거든.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국민소득 1만 달러가 되는지 안 되었는지를 기준으로 자본주의적인 생산양식이 본격적인 궤도에 들어섰는지 아닌지를 가늠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하더구나. 그렇게 따지자면 우리 세대는 자본주의적인 소비 양상이 본격화되었을 때 자라난 세대여서 그 이전의 세대와 소비에서 원하는 게 달랐다고 볼 수도 있겠지.

그런데 한국의 직장들은 40대 후반~ 50대 초반이 되면 사람들을 퇴직시켰단다. 그래서 정말 많은 사람이 퇴직금을 들고 무엇을 할까 하다가 식당이나 카페를 차려서 생계를 이어나갈 생각을 했었단다. 그리고 인구 구조상 가장 많은 사람이 퇴직하던 시기가 2020년대였었어. 그래서 음식점들은 정말 치열한 경쟁을 했고, 많은 사람이 폐업했단다. 그래서 옛날에 해오던 방식대로 음식점을 운영하던 네 할아버지가 대학가에서 경쟁을 이어나갔다고 해서 점점 치열해지는 자영업 경쟁과 소비자들의 변화 속에서 살아남으리라는 보장은 없었지. 그저 우리 집은 그 시절 흔하게 폐업해나가던 여러 자영업 가구 중 하나였을 뿐이야.

그런데 아버지는 폐업의 이유를 대학가로 가지 않아서라고 말씀하셨지. 그리고 그게 고졸이 대학가에서 장사하면 무시당할까봐라고 하셨었어. 그러면서 주변에 대학생이라고는 삼촌들밖에 없었다고, 그래서 하던 곳에서 계속 장사를 하시기로 생각했다고. 그런데 말이다, 우리 아버지는 식당에서 장사하시면서 대학생들 앞이라고 위축되거나 그러신 적은 한 번도 없었단다. 예전에 대학생 무리에게 대학에서 공부도 계속하고 부럽네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도 그 앞에서 위축되진 않으셨단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에 계속 성실하게 일하기만 했던 분이셨어.

아버지는 그저 자신의 마음속에서 탓할 사람이 필요했던 거였어.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사회 구조의 변화 속에서 벌어진 불행들에 대하여, 탓할 사람이 필요하신 거였어. 그리고 혼자 생각했었지. 아버지에게 필요한 것은 탓할 사람보다 위로해줄 사람이 아니었을까? 다만 그런 생각이 들어도 내가 그런 사람이 될 수가 없는 것 같아 무기력감을 느꼈단다. 내가 아버지에게 그것에 대하여 해드릴 수 있는 말이라곤 없다고 느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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