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님이시죠? 경찰인데요.
여름 햇살이 따갑게 창을 통해 들어오는 오후 2시. 점심을 먹은 뒤 찾아오는 노곤함에 정신이 몽롱해지고 있었다. 내 정신을 깨운 건 엄마의 이름으로 걸려 온 전화였다. 엄마는 최근 스마트폰으로 바꾼 뒤 전화를 거는 법을 몰라 ‘바로 전화걸기’가 되어 있는 나에게 수시로 전화를 걸었다가 끊곤 한다. 방금 통화를 했기에 또 잘못 걸었겠거니 하고 받지 않았는데 전화가 연이어 걸려 왔다. 창가에 앉아 햇볕을 쬐며 조는 고양이처럼 노곤함을 즐기고 있던 잠깐의 휴식을 방해한 엄마의 전화가 살짝 짜증스러웠다.
“어~. 왜?”
“아, 따님이시죠? 경찰인데요. 어머님이 길에 쓰러져 계세요. 바로 오실 수 있나요?”
한낮의 몽롱함 따위는 순식간에 없어졌다. 고양이의 환상에서 벗어나야 했다.
“어디신데요?”
“우성아파트 앞입니다. 오시는 데 얼마나 걸리세요?”
“10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네, 5분 안에 오세요.” 분명 10분이라 말했건만 경찰은 나에게 5분의 시간만 허락했다. 다급하게 부장님께 사정을 간단히 설명하고 뛰쳐나갔다. 평소에 운동을 싫어해 걷는 것도 최소화하는 나에게 10분 거리를 5분 안에 도착하라는 것은 올림픽 육상경기에 나가 금메달을 따오라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었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을 머리에 이고, 하필이면 니트를 입고 출근한 나를 탓하며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뛰어 엄마가 있는 곳까지 갔다.
엄마는 길거리에 두 다리를 쭉 뻗고 경찰의 다리에 기대앉아 있었다. 2명의 경찰과 3명의 구급대원이 엄마를 둘러싸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구급대원은 신분을 먼저 확인했다.
뭘 확인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름과 생년월일이었던가. 이름과 주소였던가. 아무튼 그들의 기준에 딸이라는 것이 확인되자 엄마에 관한 질문이 쏟아졌다. 그들의 질문에 정답을 말하기 전까지는 길바닥에 주저앉아 땀을 뻘뻘 흘리며 맥없이 앉아 있는 엄마에게 다가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어머니가 평소 앓으시는 지병이 있으신가요?”
“네,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파킨슨씨병이 있어요.”
“네? 파킨슨씨병이 있는데 혼자 돌아다니게 놔뒀다고요?” 구급대원은 나를 비난하고 있었다. 마치 내가 엄마를 방치해서 엄마가 지금 길바닥에 앉아 있다는 것처럼.
“파킨슨씨병이 있지만, 초기이고 치료를 받고 있어서 혼자 거동 가능하세요.”
“아무리 그래도 병이 있는데 혼자 둬요?” 분위기가 이상하다. 내 앞에 있는 구급대원이 빨간 모자를 쓴 귀여운 마리오가 납치당한 공주를 구하러 가는 길에 만난 쿠파처럼 느껴졌다. 이럴 때 별이라도 먹고, 반짝이 꽃이라도 먹으면 한 방에 물리칠 수 있을 텐데. 현실에서 나는 그들에게 맞춰야 하는 사람이었다.
“병원은 다니세요?” 갈수록 가관이다. 이 정도면 엄마의 숨겨놓은 아들이 아닌가 싶다.
“종합병원으로 정기 진료 다니고 있고, 지난주에도 다녀왔어요.” 그제야 구급대원은 내 앞에서 물러났고, 나는 엄마를 마주할 수 있었다.
가파른 내리막길에 다리를 오르막 쪽으로 두고 앉아 있던 엄마는 경찰과 구급대원의 도움으로 간신히 일어섰다. 파킨슨씨병의 증상이 나타나 걸음이 빨라졌고, 가파른 길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넘어진 것 같았다. 쿠파 구급대원은 갑자기 호의를 베풀어 엄마와 나를 집 앞 병원 앞에 내려줬다. 구급차는 응급실 아니면 환자 이송을 하지 않는다는 친절한 설명과 함께. 악당을 물리칠 힘이 없는 나는 고개를 숙여 감사를 전했다.
나보다 무게가 많이 나가는 엄마를 혼자 감당할 수 없어 일단 집으로 모셨다. 급하게 퇴근한 남편을 기다려 함께 병원으로 갔고, 엑스레이를 찍고 링겔을 맞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꼭 요가를 가려고 했는데...’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요가를 하러 가지 못한 게 너무 아쉬워졌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걸까... 오롯이 나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 무겁게, 무섭게 느껴졌다.
20대 중반 어느 새벽, 나는 미칠 것 같은 복통에 울면서 잠에서 깼다. 말도 나오지 않는 고통에 소리만 지르며 울어댔고, 놀란 엄마는 내 방으로 뛰어와 나를 안아줬다. 60대 후반의 엄마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딸을 업다시피 하고 택시를 잡아 응급실로 데려갔다. 그때 엄마의 얼굴은 아직도 또렷하게 떠오른다. 딸이 잘못될까 걱정하는 마음이 온전히 묻어나던 얼굴. 오늘 나의 얼굴은 어땠을까? 엄마는 나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고생시켜서 미안하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엄마는 왜 나에게 미안한걸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내 얼굴에 걱정보다 짜증이 더 크게 묻어있던 건 아닐까?
파킨슨씨는 갑자기 찾아와 엄마의 발을 묶기 시작했다. 한동안 조용히 숨죽여 지내더니 엄마에게 치매를 선물했고,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엄마의 기억과 인지력까지 탐내고 있다. 곱게 봐줄래야 봐줄 수가 없다. 엄마는 싸우려는 생각조차 없는 것 같다. 친구로 지내려는 걸까? 엄마에게 찾아온 파킨슨씨와 그의 친구 치매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