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결심했어

나만의 인생극장에서

by 봄여름


어릴 적, 주말이 기다려졌던 이유 중 하나. ‘인생극장’이라는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그래, 결심했어!” 주인공이 외치는 이 한마디를 시작으로 인생의 갈림길이 열렸다. A를 택하면 어떤 삶일까? B를 택하면 또 어떤 결말일까? 하나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보여주는 형식. 중요한 순간마다 반드시 한 가지를 골라야만 한다는 설정이 아이러니하게도 현실보다 더 현실 같았다. 그 물음을 대리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누구에게나 인기 있었던 프로그램이었다. 나 역시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 나는 어떤 모습일까?’ 어릴수록 선택지의 갈림길이 많았고, 지금의 마음을 가진 채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욕심내어 살아보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이지만, 한 번쯤은 누구나 그와 같은 장면을 떠올려보지 않을까.


최근 읽은 조예은 작가의 소설집 『칵테일 러브, 좀비』에서도 비슷하게 상상을 자극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마지막 단편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 이 작품도 마치 인생극장처럼 선택을 중심에 둔다. 주인공은 세 번의 기회를 통해 과거로 돌아가며 기억을 지닌 채 다시 결정할 수 있다. 하지만 결말은 단호했다. 아무리 돌려보고 비껴가도 정해진 운명은 반복된다. 세 번의 시도 끝에 도달하는 건 끝내 같은 인생. 그 결론이 이상하게도 수긍이 갔다. 피하고 피해도 어쩔 도리 없이 마주하게 되는 일이 있다는 메시지. 어쩌면 현실에서도 그게 더 진실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실제 삶도 다르지 않다. 문제를 피해 가려 해도 마침내 마주해야 하는 날이 온다. 당사자에겐 잘 보이지 않던 문제가 제삼자에겐 선명하게 보이는 일도 많다. 아무리 조언이 있어도 근본을 마주하지 않으면 같은 흐름은 반복된다. 삶은 회피가 아니라, 끊임없는 직면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말하는 나조차도 때때로 앞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나는 씩씩한 사람이 좋다.


누가 봐도 불우한 환경임에도 자신을 믿고 묵묵히 나아가는 사람들. 신데렐라 컴플렉스 같은 드라마 말고, 현실에서 만나는 진짜 이야기들. 이런 생각을 하던 중 책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를 읽다가 한 구절이 묵직함으로 다가왔다. “나쁜 일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도망가지 않았다.” 그 말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뭉클해졌다.


누군가는 그렇게 용감하게 살아낸다. 반면 또 어떤 이는 도망치듯 살아간다. 누구에게나 험난한 시기는 찾아오고, 그 시기를 어떻게 마주하느냐가 그 사람을 말해준다. 나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다. 도망치고 싶었던 날들, 혹은 실제로 등을 돌려버렸던 기억들. 끝끝내 망설이다 피하고 말았던 행동들. 그것들이 옳았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러한 시간들이 모여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 누군가와 비교하면 보잘것없어 보일지 몰라도, 나는 그때마다 나만의 방식으로 버텼고, 견뎠고, 때로는 애써 웃으며 걸어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인생극장’ 속을 살아간다. 매일 선택하고 삶의 방향을 만들어 간다. 기회는 세 번이 아닐 수도 있다. 결과는 좀처럼 예측할 수 없고, 돌아보면 어쩌면 틀린 결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불확실성 속에서도 끊임없이 나아간다. 인생은 피하는 것이 아니라, 마주하는 것. 나는 오늘도 조용히 마음속으로 외친다.

“그래, 결심했어.”



그래, 결심했어 / 나만의 인생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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