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기억

by 김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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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떠보니 나는 영화관에 홀로 앉아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잠에 들어버린 것이다.


영화관 곳곳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이미 이 공간을 떠나버렸고

텅 빈 영화관은 어느새 내 차지가 되어있었다.


영사기가 헛돌아가는 소리만이 미세하게 들릴 뿐이었다.


매표소 직원이 왜 나를 깨우지 않았는지 잠시 의문을 가졌지만,

나는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했다.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관 내를 가득 채운 적막의 기운은 순식간에 내 영혼을 잠식시켰다.


그 기분은 마치, 엄청난 정적 한가운데로 누군가 나를 내던진 것 같았다.


그곳엔 나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지만 나는 누군가의 존재를 느꼈고

그 존재는 분명 내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시계를 꺼냈다. 가을이 다가오는 9월의 금요일 오후 6시 23분이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금요일 저녁의 퇴근시간 도로 위를 떠올렸다.


앞뒤로 꽉 막힌 도로는 가시지 않는 답답함으로 내 기도를 틀어막아 숨통을 조여오는 것 같았다.


그때 영화관 스크린 오른쪽 끝에서 아주 미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황급히 시선을 돌려 그곳을 바라봤지만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인기척은 계속해서 느껴졌다.

어쩌면 짐승이나 곤충과 같은 인간이 아닌 다른 형태의 생명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아저씨, 도대체 거기서 뭐 하세요?"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확실했다.

정확히 영화관 스크린 오른쪽 끝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나는 당황하지 않은 척 대답했다.


"그냥 앉아있어. 일어나고 싶지가 않거든. 너는 누구니?"


그 여자아이는 내 말을 듣자마자 키득거리며 나를 비웃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대답했다.


"저요? 유이요. 조유이."


이름을 물어본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 아이의 대답이 썩 싫지만은 않았다.

거짓말이라고는 해본 적 없는 순수함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구나. 유이야 너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지 물어봐도 될까?"


"저요? 저는 아저씨를 기다리고 있었죠."


그녀의 대답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 나를 왜? 아니, 내가 누군지 알아...?"


"그럼요. 제가 설마 몰랐을까 봐요?"


나는 나를 두고 장난치는 것 같은 그 아이의 말에 순간적으로 화가 났지만 그 기분을 내 표정과 말투에 담지 않으려 노력했다.


"내가 누군데?"


"아저씨요? 곧 죽을 사람...?"


그 아이는 너무나도 담담한 어투로 내게 대답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혀 그 아이 앞에서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아이가 말을 이어나갔다.


"너무 놀라지 마세요. 아저씨도 이미 알고 계셨을 거예요. 단지 의식을 하지 못했을 뿐."


"내가... 죽는다고? 언제?"


"대략 5분 뒤쯤 일 거예요, 제 기억이 맞는다면."


그녀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 아무리 장난이라도 그런 식으로 장난치면 안되는 거야."

내가 말했다.


유이는 한동안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 자신의 몸을 숨긴 채 드러나지 않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잠시 후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저씨, 여기가 어디인 줄 아세요?"

어둠 속에서 또다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화관이잖아."

나는 대답했다.


"네, 맞아요. 하지만 동시에 아저씨가 죽게 되시면 머무르실 공간이기도 해요. 저는 그것을 알려드리고 보여드림과 동시에 선택지를 드리는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선택지...?"


"네. 아저씨가 다시 한번 더 잘 살아내기를 원하시는지 아니면 그냥 지금처럼 다가오는 죽음을 받아들이실 건지를 제가 판단해야 하거든요. 그게 제 일이니까요. 어떡하실래요, 아저씨?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앞뒤 맥락 없이 이어지는 어린 소녀의 말은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말에 굉장히 뾰족한 가시 바늘 하나가 나를 향해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급히 그녀에게 말했다.


"살고 싶어! 더 잘 살아내고 싶어.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니, 유이야?"


유이는 대답이 없었다.


그렇지만 나를 말없이 쳐다보고 있는 그녀의 따가운 시선은 느껴졌다.


그러다 그녀는 역시나 무미건조한 어투로 내게 말했다.


"알겠어요. 아저씨가 해야 할 건 딱히 없어요. 그저, 이제 곧 제가 그 줄을 끊어드리면 저와 약속하신 데로 잘 살아주시기만 하면 돼요. 단, 마지막 기회라는 걸 잊지 마세요 아저씨. 두 번의 기회는 없거든요. 아시겠죠?"


"응, 그럼. 더 잘 살아낼게. 꼭, 약속해."


나는 어둠 속에 묻혀 그 어떤 형태조차 보이지 않는 영화관 스크린의 오른쪽 끝을 바라보며 외치듯 말했다.


그 순간, 나는 몇 차원의 시공간으로부터 벗겨지듯 빠져나오는 기분과 함께 두 눈을 떴다.


.


나는 고요한 거실 한가운데 놓여있는 의자 위에 두 발을 올려둔 채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반쯤 잘린 동그란 형태의 밧줄이 보였다.


나는 급격히 빨라지는 심장을 외면하며 고개를 들어 밖을 바라봤다.


4차선의 대로변이 보이는 거실 창문 너머로 자동차들이 꽉 막힌 채 줄지어 서 있었다.


세상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깊은 혼돈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인간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때부터 목 주변이 부어올라 느껴지는 고통이 내 온몸을 감쌌다.


나는 몸을 진정시키기 위해 의자에서 내려와 거실 소파로 비틀거리며 걸어가 몸을 뉘었고 소파에 허리를 기대자 자연스레 벽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금요일 오후 6시 27분을 가리키고 있는 시계를 바라보며 나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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