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블라인드

by 김진용


엘렌을 알게 된 것은 불과 세 달 전의 일이었다.


그녀는 내가 일하던 마트에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음식을 사러 왔었기에 나는 그녀를 언제나 볼 수 있었다.


마트에서 일한지 한 달이 조금 넘었을 때, 마트의 매니저는 내게 그녀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고 나는 그때부터 엘렌의 쇼핑을 도와주는 전담 매니저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 둘은 점점 가까워지며 친해졌다.


그리고 지난 주 내가 마트를 그만둔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알렸을 때,

그녀는 차를 한 잔 대접하고 싶다며 나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평소에는 그럼 어떻게 생활해?"


내가 엘렌에게 물었다.


"평소에? 그냥 뭐 이제는 너무 익숙해서 크게 어려운 건 없어. 가끔 머릿속으로 계산을 잘못해서

벽에 몸을 부딪히는 정도 말고는. 왔다 갔다 하는 동선이 늘 똑같으니까."


엘렌은 반쯤 떠진 두 눈을 깜빡이며 내게 말했다.


초겨울을 알리는 강한 바람이 마당의 대문을 흔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실 한 쪽 구석에 놓인 스피커에서는 잔잔한 재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엘렌과 나는 따뜻한 차가 담긴 컵을 각자 두 손으로 감싼 채 소파 위에 앉아 대화를 이어나갔다.


"오늘은 그럼 내가 뭘 도와주면 될까?"

내가 물었다.


"오늘은 딱히 도와줄 건 없어. 말동무 정도만 해주면 돼. 일주일 동안 대화를 못했거든."


"알겠어."

라고 말한 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를 고쳐앉았다.


마침, 내가 앉은 곳에 그녀가 꺼내놓은 듯한 마른 빨랫감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자연스레 빨랫감들을 집어 정갈하게 포개며 그녀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그럼 혹시 언제부터 앞이 보이지 않았는지 물어봐도 돼...?"


엘렌은 나를 바라보는 듯 고개를 돌려 미소를 띄우며 내게 말했다.


"역시, 내가 널 좋아하는 이유야."


"응...?"


나는 의아하다는 듯 그녀에게 되물었다.


"너는 언제나 나를 편견없이 대하잖아. 내가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예 모르는 사람처럼."


"아...! 미안 엘렌. 정말 미안. 그럴 의도는 정말 아니었어."


"알아, 당연히. 오히려 고마워 멜라니, 나를 그렇게 대해줘서. 너말고 모든 사람들이 나를 어려워하거든."


나는 손에 집어들고 있던 그녀의 바지를 더 빠르게 개었다.

빨라진 내 행동을 눈치챘는지 엘렌은 자연스레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초등학교 때 양쪽 시력을 잃었어."


"아...그렇구나. 혹시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이유가 없어."


"이유가...없다니?"


"시력을 잃기 전날 밤까지 나는 가족들이랑 체스 게임을 하면서 놀았던 기억이 선명해. 그러고 나서 잠에 들었는데, 그 다음날 아침 일어나서부터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 온통 암흑뿐이더라고. 병원에서는 아직까지 원인을 못찾고 있으니 이유같은 건 없다고 봐야지."


나는 그녀의 말이 사실이 아니길 바랬다.

하지만 그 일은 이미 한참 전에 일어나 현재까지 이어져온 재앙과도 같은 일이었다.

엘렌은 천천히 손에 든 찻잔을 들어 차를 들이켰다.

나는 들고있던 빨랫감을 잠시 내려놓고 지그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덤덤한 척 무표정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딘가 많이 외로워보였다.


그리고 나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녀에게 따뜻한 온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내가 말했다.


"엘렌, 너만 괜찮다면 우리 다음주에 너희집에서 파티할까?"


엘렌은 무척이나 당황한듯 순간적으로 무수히 많은 표정의 변화가 얼굴에 드러났다.

하지만, 그녀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대답을 못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더 강하다.)


내가 되물었다.


"어때?"


그러자 엘렌은 여태껏 봐았던 그녀의 모습 중 가장 밝은 미소를 내게 띄우며 말했다.


"정말...? 정말이야, 멜라니? 우리집에서 파티를 열자고?"


"응, 맞아. 여기서 파티하자 우리."


그녀는 더 큰 미소를 내게 비추며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마워, 멜라니. 나 정말이지 얼마나 파티를 해보고 싶었는지 몰라.

어떻게 내 마음을 그렇게 잘 꿰뚫어 본거야? 너무 행복해 지금."


그녀의 오른쪽 눈가가 촉촉히 젖어있었다.


나는 그녀가 지나온 삶의 고통과 눈가에 맺힌 눈물의 무게를 감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통해 하나의 사실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우린 친구잖아."

내가 말했다.


그녀와 나는 친구라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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