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맡은 날

by 김진용



예상치도 못했던 어느날, 나는 나를 지나치는 너에게서 나를 부르는 듯한 네 향기를 맡았다.


두발을 구르듯 빠르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 사이로 느긋한 네 발걸음이 내 모든 시선을 사로잡았다.


네가 신은 검은색 토슈즈가 땅바닥과 부딪치며 내는 미세한 소리.

굳게 걸어잠근 금색 버클 달린 핑크 스웨터 가디건.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고정하려 무심하게 꽂은 머리핀과 너의 단발머리.

보이지 않아도 왠지 알 것만 같은 너의 미소 가득한 얼굴.


나는 살며시 너의 뒤를 좇기 시작했다.

네가 눈치채지 못하게 너의 뒤에서 나는 너의 속도에 내 발을 맞추었다.

가까워지려 할 때면 한 걸음 물러나고, 멀어지려 할 때면 한 걸음 다가갔다.


그렇게 너와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한참을 걸었을 때였을까,

너는 잠시 걸음을 멈추어 무엇인가를 찾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런 너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봤다.


너는 무엇을 찾는 것인지 정신없고 분주히 가방을 뒤적였다.


하지만 너는 찾지 못했는지 이내 가방 문을 닫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또다시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많은 사람들을 지나쳐 마치 그 어떤 이유와 목적도 없이 맞서 싸우려 전장에 나가는 군인들의 발걸음처럼 네 발걸음은 힘 있는 듯 보였지만 어딘가 모르게 많이 지쳐 보였다.


그때, 문득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저 하나의 줄기에서 뻗어 나와 순간 스쳐가는 생각이 아닌, 어쩌면 내 인생 전체를 바꿔버릴 것 같은 생각들 말이다.

누군가 나를 강하게 이끄는 생각의 흐름 속에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엄청난 확신과 함께 자석처럼 끌어당겨지는 자력과 같은 힘 속에서 나는 존재했다.


한 번 시작된 생각의 소용돌이가 매섭게 나를 덮쳐왔다.

어찌할 바를 몰라 속수무책으로 생각이란 블랙홀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알 수 없는 누군가는 계속해서 내 생각의 끄나풀들을 연결 지어 남들이 볼 수 없는 '너'라는 사람의 속을 들여다보게 했다.


그렇게 들여다본


너의 속은 깨끗했다.

너의 속은 순수했다.

너의 속은 웅장했다.

너의 속은 따뜻했다.

너의 속은 눈부셨다.

너의 속은 드넓었다.


그리고 나는 이 몇 가지 작은 다짐들을 너의 곁에서 이뤄내겠노라 스스로 약속한다.


첫째. 너의 지친 발걸음에 쉴 곳이 되어주겠노라.

둘째. 너의 고단했던 하루의 끝을 아름답게 장식해 주겠노라.

셋째. 네가 내딛는 모든 발걸음에 언제나 함께하는 그림자가 되어주겠노라.

넷째. 네가 살아왔던 건조한 사막의 모래 위로 마르지 않는 오아시스가 되어주겠노라.

다섯째. 내가 너의 손을 절대 놓지 않겠노라.

여섯째. 내가 너의 곁을 절대 떠나지 않겠노라.

일곱째. 나는 언젠가 하지만 반드시 찾아올 차가운 죽음 앞에서도 너의 사랑이 될 것을 맹세하겠노라.



이것이 어쩌면 내가 너를 처음 본 순간 맡았던 나를 부르는 듯한 너의 향기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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