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이 와 그의 친구들 (1)
정말 무더운 여름이다. 매해 느끼는 거지만 해가 갈수록 더위가 더 갱신이 되는 것인지, 도통 가을은 올 생각을 안 하고 무더위와 비만 번갈아 지속되는 요즘이다. 산책을 좋아하는 기쁨이도 낮 시간에는 뜨거운 아스팔트 바닥에 화상을 입을 수 있기에 그늘에서 쉬만 하고 도망치듯 시원한 기쁨존 누나네 중 한 곳으로 뛰어들어가곤 한다.
강아지에게도 사람처럼 그들만의 사회가 존재한다. 그 사회 안에서 규칙을 배우고 새로운 친구들도 알아가며 살아가는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기쁨이에게는 특히 그가 몹시도 애정하고 혹은 애증 하는 친구들이 존재하는데 오늘은 그들 중 간단히 추려서 두 아이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1. 모래
모래는 일명 남자들의 속된 표현을 빌려 말할 것 같으면 [불알친구]이다. 기쁨이가 4-5개월일 무렵, 산책 시간마다 마주쳤던 이 새하얗고 날씬하고 나풀거리는 털을 자랑하는 강아지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모래]이다. 매일같이 일정한 시간에 마주치면서 두 아이는 서로에게 익숙해졌는지 조금씩 노는 듯하더니 나중에는 저 멀리서도 서로의 향기를 맡고 미친 듯이 질주하여 감격의 상봉을 하는 사이까지 발전했다. 큰 대로변 너머에서 강한 눈빛이 느껴지면 그 마지막에는 늘 모래가 귀를 쫑긋! 하며 기쁨이에게 살인미소를 날리고 있었다. 둘은 거의 직립보행을 하듯 번쩍 일어나 두 앞 발로 서로를 밀치고 당기고 위에 올라타고 뒤집어지면서 30분 이상을 매일같이 놀았다. 늘 쪼그리고 앉아서 쉬를 하던 기쁨이에게 씩씩하게 다리를 번쩍 들로 쉬하는 것을 알려준 것도 바로 모래이다. 모래가 쉬하는 모습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던 기쁨이는 꽤나 어색하게 다리를 들어서 쉬하는 시늉을 쫓아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이 자세가 익숙지도 않고, 아직 한 다리로 균형을 잡기엔 힘이 부족해서 연신 기우뚱하다가 뒤집어지곤 했다. (지금 그 모습을 상상해도 너무 귀엽다.) 기쁨이에게 모래는 첫 친구이자, 노는 법을 처음으로 제대로 알려준 동네 형아이자 산책 파트너였다. 1년 이상 기쁨이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 이 멋진 형은 인근의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간 뒤로는 기쁨이와 만나기가 어려워졌다. 그래도 여전히 기쁨이는 [모래]라는 단어가 들리면 즉각 고개를 들고 반응을 한다. 보호자들끼리는 여전히 서로의 안부를 꾸준히 물으면서 서로의 강아지들의 근황을 나누고 있다. 조만간 날씨가 풀리면 다시 만나러 가보기로! 기다려 모래!
2. 영웅
이런 강아지는 처음 그려봐서 여간 몇 번을 지웠는지 모른다. 이 아이는 정말 코 앞에 살고 있는 멋진 잉글리시 쉽독이다. 회색과 아이보리 색이 적절하게 섞여있고, 파란색 오른 눈과 갈색 왼쪽 눈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세상 순둥이이다. 영웅이를 처음 만난 것은 기쁨이가 대략 5-6kg에 접어들었을 무렵이었다. 늘 커다란 강아지의 뒷모습만 보았던 우리는 어느 날 처음으로 그의 늠름한 앞모습을 마주했다. 무려 50kg의 어마어마한 몸집과 다르게 끝내주는 매너를 갖추고 있는 그는 이름도 무려 [영웅]이라고 했다. 영웅이는 기쁨이를 보고 너무 반가운 나머지 엄청난 속도로 견주를 잡아끌기 시작했는데, 아주머니가 영웅이의 힘을 이기질 못 해 뒤로 넘어지시고 줄을 놓치자 영웅이는 털을 휘날리면서 쿵쿵쿵 기쁨이를 향해 달려왔다. 딱 자기보다 10배 큰 강아지가 줄도 없이 달려오는 것을 본 기쁨이는 그야말로 기절초풍이었다. 그때는 잘 몰랐는데 엄청 무서웠던 모양인지 내 팔에 자기 두 앞 발을 휘감고 깨깨갱과 왕왕이 섞인 짖음을 꽤나 오랫동안 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기쁨이의 온 신경은 영웅이에게 쏠려버리고 말았다.
산책 때마다 기쁨이는 영웅이네 집 앞으로 질주한 다음 그 거대한 친구가 다시 나올지 말지를 수백 번의 킁킁킁으로 확인하고 정확히 영웅이가 있는 창문을 향해 르르르릉 하거나 짖거나 했다. 집에서라도 [영웅] 단어만 들리면 짖는 건 기본이고 '어디 우리 집에 들어오기만 해 이 자식아!!!' 하는 모습으로 온 집 안의 문을 단속했다. 아마 첫 만남이 너무 강렬하고 무서웠었던 게 아닌가 싶어서 우리는 열심히 영웅이를 피해 다녔다. 뒷모습이 보이면 죄지은 사람처럼 반대방향으로 질주해서 줄행랑을 치고, 혹여 저 멀리서 오는 영웅이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치면 그야말로 007 첩보작전처럼 서로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아주 재빠르게 몸을 반대로 돌리고 숨을 죽였다. 그럼에도 영웅이는 기쁨이가 몹시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우리가 나오는 시간을 아주 기가 막히게 외워버렸다. 자기 집 밑에서 창문을 향해 나름 경고를 하는 기쁨이와는 달리 창문 너머로 영웅이가 기쁨의 댄스를 추듯 이 방 저 방 뛰어다니는 그림자가 보이곤 했다.
그리고 지난 주말! 대망의 사건이 하나 일어났다.
남편과 기쁨이의 산책 길에 하필 영웅이가 코 앞에서 등장을 해버린 것이다. 미처 피하지도 못 하고 당황한 남편을 향해 영웅이 아주머니는 [이 둘을 좀 제대로 인사를 시켜봐요 우리!] 하셨는데, 거세게 짖으면서 무서워하는 듯하던 기쁨이가 조금씩 거리를 좁히기 시작하더니, 영웅이 냄새를 맡고 점점 입가를 씰룩이기 시작했다. 남편이 다급하게 보낸 사진 메시지에는 거대한 영웅이의 뒷모습과 그 뒤에서 세상 해맑게 미소를 짓고 있는 기쁨이가 있었다. 아.. 이렇게 쉽게 해결이 되다니..
지난 몇 달을 피해 다녔는데 둘의 관계는 단 15분 만에 급속도로 전환되었다. 그날 밤에도 기쁨이는 영웅이를 향해 깡충깡충 달려갔다. 냄새를 맡고 아주 쫄랑쫄랑 뒤를 쫓아다니는 모습에 모두 웃음이 터졌다. 이제 기쁨이는 영웅이가 좋다.
그런데..
좋아도 너무 좋다..
영웅이 집 앞에 위치한 누나 1의 가게 안에서 기쁨이는 이 상태로 망부석이다. 기쁨이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 거대하고 착하고 멋진 왕형아가 언제 나올 것인지, 나오면 어떻게 놀 것인지로 가득 차있다.
영웅이를 상상하는 기쁨이의 표정이 이리 좋은 것을 보면, 이제 기쁨이의 no.1은 영웅이가 차지하지 않을까 예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