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내가 인생을 헛되이 살진 않았구나
나의 소중한 인연들
암 선고를 받고 첫 치료를 위해 며칠 입원을 하였다. 이것저것 검사도 하고 치료 방향도 세우면서 암 환자로서의 새 삶을 시작할 준비를 했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멍 하게 누워있다가 생각했다. '나의 이 불행을 하루라도 빨리 지인들에게 알려야겠다. 다들 깜짝 놀라겠지?' 사실 뭐 자랑도 아니고 좋은 소식도 아니지만 내가 살고 싶고 위로받고 싶었다. 한 명이라도 내 소식을 아는 이가 많아지면 날 위해 기도해 주는 이가 그만큼 많아질 테니 더 좋지 않을까? 싶었고 지금도 이 생각엔 변함이 없다. 동정? 받고 싶은 그런 기분이랄까. 지인 중 2명도 암과의 싸움 중인데 그들은 누가 자기 병 아는 게 싫다고 한다. 철저히 비밀로 하면서 굳이 드러내지 않는다고... 나는 이제 막 알게 된 사람한테도 티 내고 말하고 싶던데... 역시 사람은 제각기 다 다른가보다.
지인들의 반응은 두 가지 반응으로 갈렸다.
펑펑 운다 VS 안 운다
이건 뭐 T냐 F냐의 차이 같긴 한데 내 소식에 나보다도 더 펑펑 울던 사람들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그렇다고 울지 않았던 이들한테 서운한 건 아니지만 울어주던 이들에게 마음이 가고 더 고마운 건 있는 것 같다. 그중에서도 입원 중에 찾아와서 울어주던 이들의 모습이 뇌리에 탁 박혀서 가끔씩 떠올리면 위로가 된다. 어쩌면 이런 느낌도 든다. 결혼식 전 후로 사람 정리가 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약간 그런 비슷한 느낌이다.
'나 지금 힘든데 반응이 이거밖에 안 되는 거야?' '내가 생각한 반응은 이런 게 아닌데' '별로 안 놀라네? 왜일까?' '그냥 연락하지 말걸 그랬네' 싶은 사람들도 분명 있었다. 어쩌면 각자 다 다른 사람들인데 통일된 반응을 바란다는 거 자체가 아이러니일 수도.
좋았던 점이 더 많다. 사실 나는 이 사람에 대해서 6 정도의(최대는 10으로 친다면) 친밀감과 호감을 갖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나에 대해 생각하는 정도가 8,9 정도로 보일 때.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생각하는 게 느껴질 때. 이럴 때 나는 고마움, 감동, 미안함, 슬픔, 위로, 용기, 희망 이런 복합적인 감정이 든다. 그때 그 순간만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물어봐주고 챙겨주는 이들이 고맙다. '아 이 사람들이 나랑 평생 갈 인연들이구나' 새삼 깨닫는다. 예전에는 벽 사이 듬성듬성 빈틈도 있었다라면 지금은 그 빈틈에 시멘트를 바르고 흙을 바르고 켜켜이 덧대서 견고해진 느낌이다. 좋다. "짜잔 앞으로 나와 쭉 함께 할 친구들이야!" 자랑하고픈 마음이다. 아직 34년밖에 안 살아봤으니 40대가 되면 또 다르고 50대 60대 점점 달라지겠지만 지금 이 순간이 좋으면 좋은 게 아닐까. 빨리 늙고 싶다. 흰머리가 난 내 모습이 보고 싶다.
얼마 전 그런 글을 봤다.
암으로 떠난 아내의 장례식에 지인들이 와서 슬퍼해주고 울어주고 그랬는데 정리를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와 보니 나는 여전히 슬픈데 지인들은 언제 슬퍼했냐는 듯 태연히 일상을 살면서 웃고, 행복해하고, 여행도 다니고 그러고 있어서 뒤통수 맞은 기분이 들었다고. 배신감이 들었다고 한다. 씁쓸하지만 현실이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고 내 일도 아니니 계속 슬퍼할 필요도 없고. 그리고 저 사람도 시간이 많이 흐르게 되면 자기 지인들처럼 평범한 일상생활을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나중에 내 가족들도 그러하길 바라고 그거면 된다. 나는 그저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 고맙고 소중하다. 나는 인생을 헛되이 살지는 않은 것 같다. 이거면 충분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