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코파이 Jun 10. 2024

내 남편의 천만금짜리 미역국

비주얼은 중요하지 않…아

며칠 전 생일이었다. 생일에 외식을 하는 게 우리 집 국룰이었는데, 컨디션 난조를 겪고 있는 나를 위해 남편이 미역국을 끓여주겠다고 한다.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지만 꽤 확신에 차있다. 이번엔 잘해볼 수 있다는 파이팅 넘치는 그를 보니, 일단은 오케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맛에 진심이다. 어떤 음식을 먹으면, 그 음식의 재료 하나하나를 따져보고 연구한다. 의미를 부여하고 스토리를 찾아본다. 재료에 대해, 재료의 스토리에 대해, 음식의 역사에 대해 이렇게나 관심을 갖는 사람은 그가 처음이다. 음식 주문을 할 때면 그 어느 때보다 카리스마 넘친다. 먹잇감을 향해 다가가는 호랑이처럼, 수술실의 의사처럼, 주방장의 메인 셰프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거침없이 주문을 집도한다. 그런 그가 시키는 음식은 웬만해선 실패가 없다. 이 정도로 맛에 진심이라면, 진로를 조리학과로 잡아야 하지 않았을까. 그가 맛에 대해서는 탁월하지만 자신만의 도마와 조리도구를 가질 수 없었던 슬픈 사연이 있다. 극복할 수 없는 태생적 한계 때문이다. 그의 손을 거쳤다 하면 자꾸만 흘리고 엇나가고 사라지는 재료들 탓이었다. 분명 간장을 한 스푼만 넣어보자 했건만 어느새 콸콸 쏟아져 있다. 볼에 마늘을 투하했지만 마늘이 있는 위치는 싱크대의 개수대 구멍이다. 어찌어찌 난장판이 된 주방에서 국 하나라도 끓인다 치면 냄비 선택이 잘못된 탓에 흘러넘쳐서 인덕션에 덕지덕지 달라붙는 건 예삿일이다. 생선이나 고기라도 굽는 날엔 싱크대며 주방 바닥까지 듣도 보도 못한 기름코팅을 하게 마련이다. 참기름 대신 올리브유를, 올리브유 대신 화이트 발사믹을 뿌리기도 한다. 조리의 기본인 계량이 불가능한 손과 급하면 재료 구분이 안 되는 흐린 눈을 갖고 태어난 그는, 자기도 모르게 진기한 경험들을 하며 요리의 한계를 느껴갔다. 뒷수습도 큰일인지라, 나도 웬만하면 그가 요리를 집도하는 걸 가만히 내버려 둘 수만은 없게 되었다. 그가 조리도구를 잡으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옆에서 맴돌며 자꾸만 손이 혹은 목소리가 먼저 뻗쳐나가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안타깝게도 점점 주방에서 멀어져 갔다. 그렇게 그는 요리 꿈나무가 아닌, 주문 꿈나무가 되어갔다. 조리도구를 쥐어보고자 했던 손엔 메뉴판만이 남았다. 그런 그가 날 위해, 다시 주방에 서겠다는 거다.


미역국을 끓이는 과정은 시작부터 험난했다. 재료를 찾는 것부터 난항이다.

“여보, 미역 어딨어?”

“여보, 마늘은? 참기름은?“

“여보, 소고기 넣을까 해물 넣을까? 근데 재료들은 어딨어?“

이 정도면 내가 끓이는 게 나을 것 같지만 꾹 참고 하나하나 알려준다. 당부도 곁들인다.

“급하게 하지 말고, 천천히 차분히 만들어봐. 알았지?”

성격이 급한 그는, 뭔가 안 풀리는 것 같자 나에게 제안을 했다.

“여보, 내가 미역국을 끓이는 게 나을까, 아니면 시장에 가서 미역국이랑 복숭아랑 블루베리를 사 오는 게 나을까? 둘 중에 선택해봐.“

“왜 꼭 그중에 선택해야 해? 미역국 재료는 다 꺼내놓고? 미역국은 끓이고 복숭아랑 블루베리는 이따 사 오면 되지!“

이래 봬도 오늘이 내 생일인데, 생일의 여왕이 이 정도는 요청할 수 있지 않나. 그는 그다음부터 군말 없이 열심히 조리를 하기 시작했다. 우당탕퉁탕 소리에 한 번씩 괜찮냐고 확인하며 누워서 얌전히 기다렸다. 한 시간여 걸려서 힘겹게 완성한 그의 미역국을 보며 함박웃음이 지어졌다. 그는 지쳐서 나가떨어졌고 맛을 보니, 흠. 더 이상 말을 잇기 힘든 그런 맛이어서 그저 웃음만 나왔다. 자꾸 웃음이 나는 걸 보니, 행복을 부르는 맛인가 보다.


저녁에 엄마가 오셔서 미역국을 보시고는, 우리 사위 최고라고 엄지 척을 해주시며 말씀하셨다.

“훌륭하네. 세상에, 이런 남편이 어딨니! 천만금을 줘도 못 바꿀 미역국이다야. 얘, 조선간장은 어디 있어? 이게 소금 맞지? 새우나 전복 같은 거는? 새우가루라도 있으면 좀 꺼내봐.”

엄마는 내 남편의 천만금짜리 미역국을 맛보시더니 갑자기 분주해지셨다. 이렇게 훌륭한 미역국에서 뭘 빼고 뭘 넣고 자꾸만 마법을 부리기 시작하셨다. 그랬더니 그저 웃음만 나는 행복을 부르는 맛에서 환상이 걷어지고 드디어 진짜 미역국이 되었다. 이제야 현실적인 맛으로 돌아왔다. 미역국의 변신은 무죄라더니. 역시 사람은 잘하는 걸 열심히 해야 하나 보다.


고마워, 여보. 덕분에 정말 행복한 생일이었어. 그치만 내년엔 당신 말대로 그냥 사 먹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아. 맛있는 걸로다가 주문을 부탁할게.





이전 09화 초등 4학년은 과외를 받을 나이인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