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둥이맘이 될 수 없었던 그여자의 사연
결혼하면 아이를 셋 낳고 싶었다. 어릴 적부터 그렇게 생각해 왔다. 딸 둘에 아들하나의 장녀라 그런가, 동생들이 있는 게 좋았다. 삼 남매, 말만 들어도 얼마나 안정적인지. 바람 잘 날 없고 북적북적한 우리 집이어서 사춘기 내내 얼른 빨리 독립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지만, 막상 독립 후에는 다시 그 북적북적함이 그리워졌다. 내가 가정을 이룬다면, 내가 자랐던 그 정신없지만 따뜻한 가정을 재현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 남편이 남자친구였던 시절, 아이 계획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우리 결혼하면, 아이를 몇 명 낳고 싶어? 나는 세명 낳고 싶은데."
"그렇게나 많이? 글쎄. 그건 결혼해 봐야 알지 않을까?"
남편은 아이를 많이 원하지 않는 듯했다. 아이들이 울고 떼쓰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멘털이 나갈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설마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건 아니지? 그의 마음을 알듯 말듯 했지만, 사실 연애 시절에 가족계획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런 건 결혼하고 나서나 세우는 건 줄 알았고 아이를 원하는지 계속 캘 만큼의 집요함도 없었다.
그렇게 결혼을 하고 결혼 3달 만에 테스트기 두 줄을 보고 놀라서 남편에게 전화를 했을 때, 남편의 반응은 "헉"이었나, "헐"이었나? 그저 그런 ㅎ자 한 단어였다. 한 단어를 내뱉고 나서는 꽤 오래 정적이 흘렀다. 왜 아무 말도 안 하냐고 했더니, 그제야 풀이 죽은 목소리로 "축하해"라고 했다. 당시엔 나도 너무 당황스러워서 그의 반응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곱씹을수록 서운했다. 그 아기가 나의 아기만은 아니잖아. 너의 아기이기도 하잖아. 마지못해 축하한다니, 너도 함께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런 생각이 들자 서운함은 배가 되어, 그의 임신 반응은 당분간 싸울 때마다 트집 잡는 나의 단골 레퍼토리가 되었다. 아기가 생기면 책임감 때문에 힘들어한다는 남자들이 있다던데, 그게 내 남편인가 보다 싶긴 했고 실제로도 그런 이유였다.
아기가 태어나고 한참 동안 둘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예민한 성향의 아이에게 동생이 생기면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더 크면 동생을 갖자고 자꾸만 미뤘다. 어디선가 본 사주에서 나에게 아이가 셋이 있는데, 큰아이가 동생들에게 치일 수 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 와서는 그 생각이 무의식 속에서 더 강해진 것 같았다. 태어나지도 않은 동생들에게 상처받는 아이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아, 왠지 더 조심스러웠다.
처음 둘째를 생각했던 건 아이가 5살 무렵이었을 때였다. 예민하던 아이의 정서는 시간이 갈수록 안정되어 갔고, 이제는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남편에게 둘째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남편은 펄쩍 뛰며 반대를 했다.
"이제야 경민이가 편해졌어. 그런데 다시 시작하라고? 또 아기를 낳으면 내 생활은 엉망이 될 것 같아."
남편은 좋은 아빠였다. 처음부터 아이를 사랑해서 자연스럽게 된 좋은 아빠가 아니라 열심히 노력해서 만들어진 좋은 아빠. 사실 그 부분이 더 대단하다고는 생각했다. 남편은 원칙을 정하면 꼭 지키는 사람이어서, 아이가 태어나고부터는 매일 일정 시간 꼭 아이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이와 함께 책을 읽든, 몸놀이를 하든, 나가서 축구를 하든, 매일 아이가 원하는 걸 함께하며 시간을 쌓아갔다. 그뿐만 아니라, 아이 앞에서 웬만하면 핸드폰도 하지 않고 티브이도 켜지 않았다. 아이가 잠들고 나서야 자기 시간을 가졌다. 아이를 위해 자기 삶을 통제하고 희생하는 부분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아빠한테도 낯을 가렸던 예민했던 아이는 이제 어딜 다녀와도 아빠를 제일 먼저 찾는, 세상에서 제일 친한 베스트 프렌드가 되었다. 물론 아이에게 아빠는 인생 최고의 멘토이기도 했다. 이런 남편이니, 아이를 또 갖자는 내 말에 반대하는 게 당연했다.
그가 둘째를 반대하는 또 다른 이유는 경제적인 부분이었다. 사실은 이 부분이 제일 컸다. 역시 '계획적인 버는 남자'답게 아이를 키우는 데 드는 비용과 독립했을 때 해줘야 할 비용까지 철저하게 계산을 하고 있었다. 남편의 생각으로는 아이들 세대에는 서울에 집을 사는 게 불가능해질지도 모르니, 서울에 집 한 채를 꼭 마련해줘야 한다고 한다. 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야 백번 이해하지만, 본인을 갈아 넣어서까지 해줘야 하는 걸까? 남편의 발목을 잡고 있는 그 생각은 쉽게 버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본인이 힘들어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아이는 그렇게 힘든 일을 안 겪었으면 하는 부모마음. 그렇기에 더더욱 아이 한 명에게만 최선을 다하고 싶은 것이었다. 만약 한 명이 더 생긴다면 비용이 두배로 들어가니, 자신이 정해놓은 은퇴 시기며 우리의 재테크 방향이 많이 달라져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까지 무거운 마음으로 둘째를 반대하는 게 이해가 되면서도 또 이해가 안 되었다.
"경민이에게 돈을 벌어서 불리는 법을 알려주면 되잖아. 왜 꼭 우리가 서울에 집을 사줘야 해?"
"나중에는 서울에 아파트 사기가 더 어려워질 거야. 경민이가 돈을 얼마나 벌지도 모르는 일이고."
"아니 그럼, 경민이가 버는 돈으로 그 안에서 집 사고 생활하고 하면 되지. 우린 필요할 때 보태주는 식으로 해도 되고."
"난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해주고 싶어."
"와, 경민이가 세상에서 제일 부럽다. 여보, 내 아빠 해라."
남편과 나의 의견차이가 좁혀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평행선이었다. 포기해야 할 것들이 아이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줄 수도 있다. 결핍을 아는 아이가 그 결핍을 원동력으로 더 잘 자랄 수도 있다고 믿는다. 아이는 왜 꼭 서울에 있는 아파트에 살아야만 하는가?
우리 부모님들을 생각해 보았다. 아이가 둘이든 셋이든 멀쩡히 잘 교육시키고 결혼시키고 다들 사는 모습은 비슷하다. 나의 부모님은 공무원 외벌이로 힘들게 사시긴 했지만, 꼭 필요한 교육 선별해 자식 셋 잘 교육시키고 결혼도 잘 시키고 우리들을 키우면서 "너희 때문에 힘들어."라는 말씀은 한 번도 안 하셨다. 그저 당연히 부모로서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셨고 해 줄 수 있는 부분은 최선을 다했지만 안 되는 것까지 억지로 해주시진 않았다. 시부모님도 마찬가지다. 부유하게 잘 사셨고 사교육도 많이 시키셨지만 위기가 왔을 때는 안 되는 것까지 해줄 수는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셨다. 그 과정에서 상처는 있었어도 다들 이해했고, 결과적으로는 자식들 다 잘 커서 자기 자리에서 큰 잡음 없이 살고 있다. 그저 우리는 할 수 있는 한에서만 최선을 다하면 된다.
그랬던 우리에게 둘째 아이가 생겼던 건, 재작년이었다. 여동생이 둘째를 출산한 지 얼마 안 되었던 그 해 여름, 오랜만에 안아보는 신생아를 보고 사랑에 빠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도 테스트기 두 줄을 봤다. 그러고 나서 일련의 과정들. 병원에서 아기집을 보고 아기를 보고 심장소리를 듣고, 지금 생각해 봐도 꿈만 같았다. 그토록 (나 혼자만) 원하던 아기가 드디어 생겼구나 하는 생각에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뻤던 것도 잠시, 나만의 현실적인 고민들이 콩나물 대가리처럼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아기가 태어나면 우리 경민이는 몇 살이지? 터울이 이렇게 많은데 괜찮을까? 애 키우는 거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이제 일 시작해보려고 했는데 그럼 난 어떻게 되는 거지?
둘째를 원하지 않았던 남편은 의외로 나보다 더 기뻐했고 아기가 소중하다고 했다. 임신반응에 대한 교육을 받았던 결과인지, 진심인지 헷갈렸다. 그러면서 "이제 돈을 더 벌어야겠네" 의지를 다지던 그였다. 의무감을 느끼면서도 최선을 다할 걸 알기에, 그가 믿음직스러웠다. 동시에 그만의 현실적인 고민들, 돈에 대한 고민들이 구체성을 띠며 또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무거운 고민들로 인해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7-8주 사이의 어느 날, 아기는 심장을 멈췄다. 그날이 하필이면 친정엄마와 함께 병원을 갔던 날이었다. 유산은 아팠다. 몸은 괜찮았는데 마음에 뭔가로 도려낸 듯한 생채기가 남았다. 짧게 머물다 간 아기였지만 마냥 기뻐해주지 않았던 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간단한 수술로 내 몸의 작은 흔적은 영원히 사라졌다. 수면 마취에서 깨어 허전해진 아랫배를 붙잡고 하얀 천장을 보며 나도 모르게 흐느꼈다. 누구의 탓도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그렇게 기다리던 아기를 내 욕심에 지켜내지 못한 게 아닌가 왠지 자책도 하게 되었다. 그래도 시간은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 내가 먼저 건강해져야겠다 생각하고 밖으로 나갔다. 해를 보고 걷고 또 걸었다. 아픔은 그렇게 무뎌져갔다.
서울에 집 한 채 타령을 하던 남편은 그 이후로 말을 아꼈다. 뭐든 계획을 세우고 그대로 실행을 하는 남편이었지만, 내려놓음도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을 테지. 생각의 기본 골조는 변함이 없을 거였지만, 상실의 경험이 그로 하여금 '꼭 그렇게 해야만 한다'에서 '그렇게 하면 좋을 것이다' 정도의 변화를 만들어 낸 건 확실하다. 냉철한 그에게도 잠깐 찾아온 아픔의 시기는 확실히 충격이었고, 그로 인한 생각의 작은 전환점을 맞이한 것이었다. 뼈아픈 발전이었지만, 긍정적인 변화이긴 했다.
그리고 이제는 전보다 유연해진 그와 함께, 우리의 노후를 잘 보낼 방안을 고민해 볼 타이밍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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