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시절부터 그들에겐 싹이 보였다.

feat. 데이트 통장

by 초코파이

벌써 10년도 더 지난 남편과 나의 연애시절로 돌아가서. 우리는 달랐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특히나 데이트라고 하면 먹는 것이 거의 전부가 아니던가. 그런데 우리의 먹을 것에 대한 취향은 MBTI만큼이나 달랐더랬다.


그때 당시만 해도 인생 최저 몸무게를 갱신하던 리즈시절. 빼빼 마른 말라깽이에, 그 몸매를 유지하려 먹는 것은 생존을 연명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맛있는 걸 싫어하진 않았지만, 굳이 왜 찾아서 먹으러 다닐까 이해가 되지 않던 그 시절. 게으르기도 나무늘보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게을렀던 나는 숨쉬기 운동만으로 몸무게를 유지하려니, 먹는 게 갈수록 부담스러웠다. 태어나길 하비로 태어나 왜 그렇게 미니스커트에 욕심을 냈는가. 그래도 그때는 먹는 것만 줄여도 살이 쑥쑥 빠지던 아름다운 대사량이 있던 시절이어서 악착같이 덜 먹었던 것 같다.


그랬던 내가, 세상 먹을 걸 좋아하는 남자를 만났다. 그는 맛있는 걸 생각하면 입에 침이 고이는 남자였다. 먹을 것에 있어서 만큼은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된장남, 트렌드리더였다. 그때 당시 직장인들 사이에서 한참 유행이던 현대카드 고메위크가 되면, 가고 싶은 음식점을 몇 개씩은 찍어놓고서 우리가 가야 할 맛집 지도를 설계했다. 대동여지도를 그리는 김정호의 눈이 그랬을까. 말하는 중간에도 어찌나 초롱초롱 눈이 반짝이던지, 도저히 이 남자에게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랬다간 실망의 여파가 쓰나미처럼 몰려올 것만 같았다. 마지못해 오케이를 했지만, 그가 가고 싶어 했던 음식점들이 맛있기도 했거니와 분위기도 좋은 곳들이어서 (그때만) 소식좌 중의 소식좌였던 나도, 사실은 함께 눈과 입이 즐거워진 순간들이 많았다.


그는 맛있는 음식이라면 종류 가리지 않고 다 좋아했다. 한식, 중식, 일식은 기본, 이탈리안, 프렌치, 모로칸요리 등등 음식으로 세계일주를 하는 남자였다. 전라도 최남단 미식의 도시에서 자라, 웬만한 음식이나 식재료에는 별 기대도 감흥도 없는 나조차도 눈이 휘둥그레 해지는 경험이었다. 메뉴를 세분화해서 알고 있는 곳들도 꽤 많았다. 예를 들어 중식을 먹으러 간다 치면, 그중에서 군만두는 어디, 딤섬은 어디, 짜장면은 어디 이렇게 메뉴 하나하나의 맛집을 리스트에 올리는 그는 맛집 헌터였다.



그는 디저트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밥을 먹고 꼭 카페에 가야 하는 남자. 커피에 진심인 남자. 그리고 커피에 맛있는 디저트를 한입 베어 물면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디저트형 인간. 나는 밤에 커피를 마시면 심장이 두근거려서 밤을 꼴딱 새우고, 디저트를 먹으면 갑자기 들어온 당에 몸이 놀라 몸부림치며 컵라면에 김치 생각이 간절해지는 사람이었다. 잘 먹고 다닐 때에도 커피보다는 술, 달달한 것보다 맵고 짠걸 오히려 더 선호하는 안주형 인간이었다. 먹을 것에 흥미가 떨어져 최대한 덜 먹으려 하는 안주형을 데리고서, 디저트형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자기의 세계를 한없이 펼쳐내는 중이었다. 그동안 어떻게 먹고살았나 날 만나기 전의 안위가 걱정될 정도로, 맛집 리스트를 꿰차고 있었던 것이다. TV나 영화의 데이트 장면에 나올 법한 레스토랑이나 카페들을 집 앞 슈퍼 가듯 들락날락거리는 게 우리의 일상이 되어갔다.




이리하여 데이트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맛있는 밥에 맛있는 커피에 맛있는 디저트에 하루에 쓰는 돈은 식비, 식비, 또 식비. 가끔 놀러 가기도 했지만, 놀러 가서도 식비. 게다가 우린 거의 매일 만났으니, 매일 가계부를 보던 그가 슬쩍슬쩍 결혼 얘기를 꺼낼 법도 했다. 식비 줄이려고 결혼하려 하나? 그 의식의 흐름이 맘에 안 들어 칼을 꽂아주고 싶다는 마음도 생겼지만, 오죽하면 그럴까 이해가 되기도 했다. 어떨 땐 그가 내고 어떨 땐 내가 냈지만, 그가 낼 때가 더 많았을 것이다. 어차피 우린 비슷한 직종에 종사하고 있는 직장인들이어서, 그가 더 내는 게 불공평하게 느껴졌을 거고.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가계부를 볼 때마다 고뇌에 찬 그의 표정을 보고서 내 마음도 같이 쓰라렸다. 먹을 걸 멈추고 싶지는 않지만 돈은 덜 쓰고 싶은 모순된 마음 때문에 괴로워진 그는 점점 가계부를 멀리하게 되었다. 그런 그를 보며 고민하다가 어느 날, 내가 제안했다.

“우리 데이트 통장을 만들어서 쓰는 게 어때?”

“별로 의미 없을 것 같은데. 어차피 같이 쓰는 건데, 뭐.”

“아냐. 네가 데이트 비용을 훨씬 많이 내는 것 같아서 그래.”

“그래? 정 그렇다면 만들지 뭐.”

이런 대화의 흐름이었을 것이다. 그는 마지못해 찬성을 하는 것 같았지만, 그 표정으로 봤을 땐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여자친구가 이런 제안을 먼저 하다니 감동을 받은 눈치였다. 실행력 하나는 끝내주는 그는, 그 길로 은행에 가서 바로 통장을 만들어왔다. 이렇게 바로? 조금 부담스러운 마음이 모락모락 피어났지만, 어쨌든 내가 제안한 길. 우리는 통장에 매달 일정한 금액을 넣기로 합의를 보고, 그 금액 안에서 데이트를 하기로 결심했다.




첫 한 달은 성공적이었다. 금액을 제한해 놓고 데이트를 해보니, 우리가 얼마나 막 써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좋아하는 음식을 줄이게 되었지만, 지출도 줄어든 가계부를 보며 위안을 삼았다. 그에 비해 일하는 시간이 짧았던 나의 자취방에서 요리를 하기도 여러 날. 둘째 달, 셋째 달을 지나며 그래도 우리는 점점 버티는 듯 보였다. 그런데 그간 먹을 것에 얼마나 돈을 써댔는지, 이미 버릇이 들어있어서 그런가 자꾸만 욕구불만이 생겼다. 정말 안 먹던 나도 어느 순간부터 ‘맛있는 커피에 디저트 좀 먹으러 가면 소원이 없겠다’ 주문처럼 이런 비슷한 말을 되뇌게 되었다.


내가 하는 말이라면 일단 yes로 입력된 그는, 처음 몇 번은 눈빛이 흔들리더니 어느 순간부터 다시 먹을 것을 탐하는 처지로 되돌아와버렸다. 우리는 그렇게 다시 점점 맛집을 찾게 되었다. 한번 절제했다가 다시 찾게 된 우리의 맛집들은, 기다렸다는 듯 여전히 우릴 반갑게 맞아주었다. 다이어트를 했다가 실패하면 더 먹게 된다는 요요의 법칙에 따라, 우리는 그다음 달 최고의 지출을 경신하고 말았다. 데이트 통장이고 뭐고 의미가 없어진 순간이었다.


결국 우리는 데이트 통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사진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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