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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타란티노적이고,  조금은 하루키풍의 '요즘 소설

김쿠만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판교』(2025)

by Ennui Mar 2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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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어떻게 받아들 것인가? 미래는 어떻게 도래할 텐가? 이것이야말로 현대(소설)의 아포리아다. 우리는 영원한 현재에 갇혀 있다. 돌아갈 수도 없고 나아갈 길도 끊긴 시대에. 이마저도 별로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는 시간 관념에서 벗어난 채로 알 수 없는 지점을 맴돌고 있다. 폐쇄회로를 달리는 열차처럼.


김쿠만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판교』는 제목과 필명에서부터 과거를 가리키고 있다. 첫 소설집의 제목에서도 사이먼 레이놀즈의 『레트로마니아』를 빌려 왔듯이, 김쿠만은 이번에도 쿠엔틴 타란티노의 근작에서 제목을 빌려 왔다. 그의 필명 또한 ‘쿠’엔틴 타란티노에 대한 오마주인 만큼, 더욱이 소설 내내 타란티노 영화의 시그니처인 ‘레드애플’ 담배가 등장하는 만큼, 타란티노에 대해서 잠깐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겠다. 게다가 김쿠만이 타란티노를 적극적으로 호명하는 것은 사실 단순한 제스처 같지는 않다.


누구나 알다시피, 타란티노는 젊은 시절 비디오가게 점원으로 근무하며 스파게티웨스턴과 각종 익스플로이테이션필름들을 섭렵했다. 선혈이 낭자한 폭력적인 B급 영화에 깊이 매료되었으며, 당시에 수집한 6070 영화들의 소스를 입맛대로 해체하고 재조립하여 90년대의 기념비적인 감독이 되었다. 그의 출세작인 〈펄프 픽션〉은 비선형적 스토리텔링 기법을 성공적으로 장르화한, 그러니까 시간 순서를 이리저리 마구 뒤섞어 놓은 영화였는데, 한국 개봉 당시 한 영사기사가 이를 오해하곤 적확한 시간 순서대로 필름을 복원해 놓았다는 우스운 후문도 있다(이번 소설집에 실린 단편 중 하나에서도 차용한 일화다).


이전에도 시간이라는 테마를 독창적으로 다룬 영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펄프 픽션〉이 상업적으로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뒀다는 점이다. 타란티노는 제시간에 나타났다. 90년대는 타란티노를 쿨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었다. 『X세대』의 작가 더글러스 커플랜드는 자기 시대에 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는 시간을 정의할 만한 문화적 활동이나 그런 순간을 만들어 낼 능력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우리는 이렇게 무시간성timelessness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 언젠가 공산주의가 공식적으로 끝났다는 헤드라인을 본 적이 있다. 나는 그냥 "오!" 하고 감탄할 뿐이었다. … 사회 전체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았다. … 나는 다시 시간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시간을 규정할 수 없으면 플롯을 구성할 수 없다. 플롯을 구성할 수 없으면 의미를 생성할 수도 없다. 적어도 서사라는 맥락에서는 그렇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타란티노의 영화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의 폭력은 샘 페킨파의 영화에서처럼 인간의 실존적 불안을 건드리지도 않고,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에서처럼 불가해하지도 않다. 타란티노의 폭력은 오로지 유희에만 봉사한다.


그게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사실 나는 타란티노를 꽤 좋아한다. 타란티노의 영화에 미학적이고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다. 타란티노야말로 의미의 강박을 완전히 벗어던져 버린 첫 번째 세대였다고. 타란티노는 역사나 현실 따위를 신경 쓰지 않았고, 그래서 자기 멋대로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다고.


문제는 우리가 90년대를 떠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사반세기가 지났는데도.


쿠엔틴 타란티노의 근작은 60년대를 회고하는 영화고, 그다지 재미있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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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판교』는 '포스트모던'하게 시간 축을 뒤섞는다. 소설 바깥의 참조점을 거부하거나 마음대로 전용하고, 작가 멋대로 세계를 창조해 낸다. ‘레드애플’, ‘남해’, 소설가, 게임과 AI 등의 테마는 이 소설집을 한 편의 연작소설처럼 읽게 만든다. 김쿠만이 구술하는 ‘판교’는 장류진의 판교 리얼리즘과는 다르며, 그가 회고하는 기억은 사실 겪지 않은 것에 대한 노스탤지어다.


그러면서도 이 소설은 '포스트-포스트모던'하게 시작과 끝을 가리키고 바라보며 한 걸음씩 나아가려 한다. 시작은 찾을 수 없거나 아무렇게나 뒤적거린 곳에서부터 시작하고, 끝은 그렇게 벌려 놓은 이야기가 더 나아갈 수 없는 지점에서 적당히 끝맺으면서도, 마치 백년열차의 속도처럼 느리게, 자꾸 뒤돌아보며 진행하는 소설은 예측 또는 상상으로 찾아낸 '과거의 미래'를 그리워한다. 열차를 멈춰 세우고, 밖으로 나가 헤매려 한다.


나야 물론 안 그래도 헤매고 있고, 또 게으르고 걸음이 더딘 탓에, 이런 소설을 즐겁게 읽을 수 있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 또한 아직 미래-소설은 아니라는 확실한 예감, 또한 여전히 방향 감각이 불분명한 '요즘 소설'일 뿐이라는 아쉬움도 남는 것이 사실이다.


말미에 실린 비평마따나 이 소설이 과거의 낭만과 자유로움을 애정하면서 폭력과는 '깨끗하게 결별'했다면, 그건 작가가 도덕적이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아직 도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쿠만의 소설은 타란티노처럼 오락적인 폭력을 전시하고 즐기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타란티노를 졸업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김’쿠’만이겠지만…)


요컨대 김쿠만은 아이린과 메구미 사이에서 끝없이 '고민 중'인 것이다. 어쩐지 치열하다기보단 약간 늘어진 듯한 모양새로. 그러니까 하루키풍으로.


작가나 작품에 책임을 물을 생각은 없다. 어쩌면 이건 시대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예측 가능성을 돌파하여 미래다운 미래를 상상하는 소설을 기다린다. 텍스트는 시대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어느 지점에서는 의미심장한 균열을 일으키고, 마침내는 기어코 돌파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은 시계 태엽을 다시 돌려야 하는 때라고 나는 믿지만, 그러나, 약간 졸리운 듯이 손가락을 꼬며 태엽을 되감지 않고서는 태엽을 돌릴 수도 없을 것이다.


멋대로 과거를, 현실을, 정치를, 도덕을 점유하고 섣불리 전쟁에 나서는 ‘가짜 미래 소설'들—나는 지금 올해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 <그 개와 혁명>과 그 밖의 엇비슷한 ‘요즘 소설’들을 떠올리고 있다—보다야, 나는 이쪽이 더 미덥다는 얘기다.


물론 그것도 여기까지다. 첫 책부터 '레트로 마니아'임을 밝혔던 작가가 세 번째 책에서도 '원스 어폰 어 타임'을 읊었다면, 다음 책은 이제 현재를, "그러니까 미래의 일이 될" 소설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적어도 미래로 다가가야 될 것이다. 포스트-타란티노 시대로. 펄프픽션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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