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정말 건강해질 것 같은 기분이다.
“해피 클린 뉴 이어”를 외친 지 근 열흘 만에 4주 금주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12월 말에 불상의 통증으로 냅다 병원에 달려가 온갖 검사를 하고선 열흘 만에 조직검사 결과가 나왔다. 다행히 암은 아니었다. 대신 혹의 모양이 좋지는 않아서 제거수술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걸 가만히 놔두면 혹이 더 커지거나 암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는데 어쩌겠는가, 혹과 이별하는 수순을 밟을 수밖에.
수술을 하는 건 당연하다 치지만, 수술 시기를 잡는 것이 아주 난관이었다. 사실 방학을 맞아 미뤄뒀던 친구들과의 신나는 파티(with 알코올)를 포함해 온 가족과 즐거운 명절(with 알코올)을 한참 기대하고 있던 차였다. 또, 1월에 J와 부산여행을, 2월에 나 홀로 해외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지금 수술을 한다는 것은? 사실 시술에 가까운 수술이라 모든 일정을 차질 없이 진행할 수는 있겠지만, 내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인 술이 빠져야 함을 의미했다.
“수술 날짜는 언제로 잡아드릴까요?”
나는 휴대폰 캘린더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언제 수술을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으로 술을 마실 수 있을지를 계산했다. (놀랍겠지만 실화다.) 가장 빠른 날짜에 수술을 하면 2월 해외여행에서는 술을 마실 수 있다. 아니면 주말에 예정된 부산여행에서 신나게 술을 마시고 나서 수술을 하는 방법도 있다. 혹은 설 명절까지 가족들과 음주를 마음껏 즐기고, 2월에 수술을 받을 수도 있다. 아니, 아예 2월 여행까지 다녀온 뒤 방학 동안 술을 최대한 마시고, 2월 말에 수술하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머리를 빠르게 굴리다 문득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술이 대수니?’. 아차차, 나는 모든 계산을 치워버리고 말했다.
“수술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날에 할게요.”
그렇게 해서 내 수술일은 진단 3일 뒤로 잡혔다. 당장 3일 뒤인 수술일부터는 빼도 박도 못하게 근 한 달을 술 없이 살아야 하는 몸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의 방학 플랜 A to Z에는 모두 금주 대신 음주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나는 그 계획을 한꺼번에 모두 폐기하고 새로운 계획을 세워야 했다. 이름하여 <금주 플랜 A to Z>. 4주를 꼬박 술 없이 산다니 어쩐지 막막하게 느껴졌다. 금주 플랜이 책이라면 첫 문장으로 “오늘, 술을 끊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잘 모르겠다.”라고 쓰고 싶기까지 했다. 아, 부조리한 삶이여.
그렇다고 금주의 기간을 내 맘대로 줄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는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아니 즐기진 못해도 최대한 활용해라.”의 마음으로 금주에 접근하기로 했다. 그동안 술 먹느라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던 숙제와도 같았던 일들을 남아도는 시간과 남아돌 체력으로 모두 해내 버리리라. 예를 들면 사랑니 뽑기나 피부과 가기, 다이어트나 책 읽기 같은 알코올과 상극인 것들로 치부되는 것들 말이다.
잠깐, 내가 그 일들을 해치우기 전에 주어진 시간으로 3일이 남은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수술까지 3일이 남았다는 것은, 내가 술을 마실 수 있는 시간이 3일 남았다는 뜻으로 의역되니까 말이다. 이순신 장군님께서는 330척의 왜적을 해치우는데 12척의 배로도 충분했다고 한다. 나 역시 4주의 금주를 대비하는데 3일이 부족할까. 그렇지만 양심상(?) 수술 바로 전날은 술을 마시지 않기로 스스로와 약속을 하고 나니 남은 시간은 딱 이틀. 어차피 수술은 의사 선생님이 하는 거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수술 준비는... 수술 후에 마시지 못할 술을 미리 먹어두는 것뿐이었다.
사실 검사 결과를 듣기까지 약 열흘간 금주를 하고 있었으므로 오랜만에 마시는 술맛이 새삼 꿀맛 같았다. 게다가 오랜만에 술을 원하는 만큼 마시고 나니, 다음날 아침의 적당한 숙취가 왠지 만족스럽기까지 했다. ‘어떻게 숙취까지 사랑하겠어 술을 사랑하는 거지’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구나. 난 숙취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었어. 그러니까 그 많은 숙취를 겪고도 꿋꿋이 술을 마셔왔던 거구나,를 새삼 느꼈다. 그리고 이제 몇 주 간 느끼지 못할 숙취를 기꺼이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하여튼 술을 미리 마실만큼 마셔둬서 그런 건지, 양심상 수술 하루 전에 술을 마시지 않아서 그런 건지 의사 선생님 말처럼 수술은 짧은 시간 안에 잘 마무리 됐다. 회복을 위해 입원실에 누워있다가 수술 후 주의 사항이라 쓰인 종이를 한 장 받았다. 일상생활 가능, 운전과 샤워 내일부터 가능, 격한 운동은 이주 뒤부터 가능, 음주는 3~4주 이후 가능. 수술 후에는 당연히 금주해야 함을 인지해왔으나, 나는 성문화된 규칙을 참 잘 지키는 타입이라 그런지 이 종이를 받고 나니 누가 “자~ 지금부터 진짜 금주 레이스 준비~ 시~작!”이라고 신호총을 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당연히 신체적 회복이 최우선이겠지만 나에게는 금주가 더 큰 시험으로 다가오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내 친구들도 나에게 드디어 금주 에세이 저자로서 금주다운 금주 좀 해보겠네,라고 하는 걸 봐서는 나만 그렇게 느낀 건 아닌 것 같다.
아무튼 새해 벽두부터 열심히 드나들었던 병원과의 만남이 일단락되어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덕분에 새해 키워드가 금주가 되었으니, 내가 운명처럼 기다렸던 그 완전 금주의 순간이 드디어 올해인 것 같다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나는 4주라는 기간 동안 술을 얼마나 그리워할 것이며, 또 얼마나 술과 멀어질 수 있을까? 꼭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것처럼 걱정과 설렘이 공존한다. 꼭 환승연애 출연진이 된 기분이다. 4주라는 시간을 보내고 나의 X인 음주와 익숙한 관계로 돌아갈 것인가, 뉴페이스인 금주와 새로운 인생 청사진을 그릴 것인가. 각자의 매력은 뚜렷하지만 내 몸이 하나인 관계로 하나의 선택만이 있어야 할 때다.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새로운 커플 탄생을 응원하는 편이나, X에게 돌아가는 경우도 있는 걸 봐서는 편안함과 익숙함으로 명명되는 “정”이 어쩐지 더 무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4주 뒤 다시 음주하려고 밑밥 까는 것 같다고 느꼈다면... 아마 당신은 생각보다 눈치가 빠른 사람인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나의 금주 플랜은 풀가동 중이다. 4주가 지나고도 이 플랜이 유효할지는 모르겠지만, 힘과 의지가 닿는 데까지는 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막상 그때가 되면 술을 끊은 4주가 아까울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그땐 더 이상 플랜은 필요 없을 것이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격언의 주어가 술이 아닌 건강임을 다시 한번 상기하며, 그렇게 점차 음주하는 날보다 금주하는 날이 당연스레 더 많아질 내 인생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