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행을 아주 좋아하고, 특히 여행지에서 술 마시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
같은 술을 마시더라도 여행지에서 마시는 술은 왠지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여행의 기분을 한껏 끌어올려 주는 마법의 묘약 같달까. 그래서 나는 혼자 여행을 가도, 단 둘이 여행을 가도, 여럿이 여행을 가도 절대 빠지지 않는 필수 일정이 바로 “술 마시기”다.
그런 나에게 최초의 경험이 생겼다. 여행을 가서 술을 단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여행지는 오래전부터 자리를 지킨 터줏대감 같은 노포들부터 멋진 뷰와 세련된 감성의 레스토랑은 물론, 최근엔 심지어 미슐랭 스타를 받은 식당들도 여럿 있는, 내가 정말 사랑하는 식도락의 도시, 부산이었다. 나도 놀랐다. 내가 조개구이에, 회에, 국밥에, 가지튀김에, 아무튼 여행지에서 내로라하는 맛집을 전부 돌면서도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있다니! 얼마 전 수술로 인해 금주를 명받긴 했지만, “술=알코올=소독, 즉 술=소독”이라는 기적의 삼단논법을 철석같이 믿고 사는 내가 술을 마시지 말란다고 정말 술을 마시지 않은 건 처음이었던 것이다.
여행의 주목적이 말 그대로 “여행”이어야 한다니, 이 당연함이 나에게는 무척이나 새삼스러웠다. 여행은 타지에서 맛있는 음식에 맛있는 술 마시기 위해 가는 것 아니었나? 내가 생각하는 여행의 필수 3요소에서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술”이 빠져야 한다니 혼란스럽기도 했다. ‘술을 못 마신다니, 그럼 여행 가서 뭘 해야 하지?’ 나는 여행을 가기 전에 무조건 엑셀로 계획을 짜놓는 파워 J형 인간으로서 계획을 짜는 것부터가 막막했다. 막막할 것까지 있겠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성인이 되고서 술을 마시지 않는 여행이 처음인지라 여행지에서의 저녁과 밤이 술 없이 지속될 수 있는지가 정말 진지하게 고민됐다. 솔직히 여차하면 그냥 술 마셔버리겠다는 생각도 조금 있었다.
아무튼 남들에게는 고민거리도 아닐 고민들을 겨우 덮으며 어떻게든 짜낸 계획표를 들고 동행이자 아픈 나를 위해 기꺼이 짐꾼이 되어준 애인 J와 부산으로 향했다. 술 없는 여행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계획표에는 혹시 모를 음주에 대비하듯 버릇처럼 아침 식사는 모두 해장국으로 넣어둔 채였다.
술 없는 여행 첫째 날 저녁으로 조개구이를 먹었다. 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조개구이 술 없이 먹어봤냐고, 아니 술 못 마시는 때에 조개구이를 먹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나 있냐고. 신선한 조개가 불판에 구워지며 입을 쩍 벌리는 순간, 탱글한 조갯살이 짭조름한 육수와 함께 자글자글 익어가는 것을 보자 나는 정말 괴로워졌다. 프로 음주러인 내가, 술 없이 조개구이를 먹는다고? 그게 된다고? 조개구이가 단지 식사에서 끝날 수 있는 음식일 수 있다고? 앞 뒤 양 옆 모두가 술을 마시고 있는데, 나만 술 못 마신다고? 나는 이 완벽한 음식에 술을 마시지 못하는 것을 한껏 억울해하면서도 착실하게 조개를 까먹으며 가리비와 치즈의 궁합을 찬탄했다. 접시에 가득 찼던 조개를 다 구워 먹고선 해물라면까지 끓여 먹고 나니 왠지 보스몹을 쓰러트린 기분이었다. 난 이제 조개구이도 술 없이 먹을 수 있는 사람이다! 다른 안주들 다 덤벼! 조개구이도 술 없이 먹었는데 너네들 정도는 술 생각조차 없이 맛있게 먹어주마! 같은... 그런 기분?
그리고서 술 대신 승리감으로 기분 좋게 채운 배를 통통 두드리며 광안리 바다를 산책했다. 광안리의 밤바다는 취하지 않고 봐도 예뻤다. 멀쩡한 얼굴로 포토부스에서 사진도 남기고 드론쇼도 봤다. 조그마한 책방에도 갔다. 원래 같았으면 한창 술을 마시고 있었을 시간이었을 테지만, 여행에서 술이 빠지니 자연스럽게 이 시간들을 더 다양하게 채우고 있었다. 심지어는 한 번도 사본 적 없었던 슬라임을 사서 숙소에 돌아가 J와 한참을 슬라임을 만져가며 놀았다. 슬라임이 조금 지겨워지자 무알콜 와인을 마시며 새벽까지 좋아하는 드라마를 봤다. 알코올만 없었다 뿐이지 여행은 다채로웠고, 가득 차 있었다. 왜 술을 마시지 못한다고 허전하고 심심한 여행이 될 것 같다고만 생각했을까. 술이 아니더라도 세상에는 재밌는 일이 정말 많은데.
그렇게 남은 이틀도 술 없이 가득 채운 여행을 했다. 술을 먹지 않아 컨디션이 아주 좋았으므로 많이 걸어 다니며 한가롭게 부산을 즐겼다. 멋진 전시들을 보고 크고 작은 서점들을 방문하면서도 체력적인 부담이 없었다. 늘 전날의 과음으로 인해 속이 좋지 않아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국밥도, 술을 먹지 않고 가서 먹으니 더 맛있었다. 술 없이 어떻게 먹냐던 회도 무알콜 와인과 함께 먹으니 맛과 분위기를 모두 해치지 않고 즐길 수 있었다. 의외의 복병이었던 가지튀김에는 맥주가 미치도록 마시고 싶었으나, 끝내 참아냈다.
나는 이번 여행을 앞두고 솔직히 걱정이 컸다. ‘술을 가장 좋아하는 내가, 어딜 가든 여행의 목적에 술이 빠지지 않았던 내가, 술이 선택지에조차 들지 못하는 여행에서 즐거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강했다. 그때까진 술을 선택하지 못하는 대신, 다른 즐거움들에 집중하면 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술이 차지했던 커다란 부피의 시간을 덜어낸다 해도, 다른 촘촘하고 세세한 즐거움들로 그 시간을 가득 채울 수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곤 한다. 이번 여행을 통해 나는 처음으로 술 없이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다는 걸 경험했다. 그리고 문득 궁금해졌다. 내 인생이라는 여행에서는 술이 아닌 다른 즐거움으로 얼마나 많은 날을 채울 수 있을까. 그 답을 찾는 여정은, 어쩌면 이제부터 시작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