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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궤도-서맨사 하비

by 성새진



<궤도>를 읽으며 나는 땅을 짚고 서 책을 손에 든 채로 6명의 우주 비행사와 같은 금속선 안에서 무정형의 상태로 떠오른다. 시작점과 끝점을 함부로 지정할 수 없는 궤도에서 저항없이 항해한다. 흐르지 않는 시간을 세뇌하며 억지로 헤아린다.




우주 탐사라는 원대한 목표 속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걱정과 고뇌는 사소하고 미약하게만 느껴진다. 우주라는 거대한 원초는 인간의 비대한 자아를 비웃는 듯하다. 우주에서만큼은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개인에게 대폭발과의 위력을 가질만한 사건도, 한 나라가 쑥대밭이 될 정도로 몰아치는 거대한 태풍도 무감각할 뿐이다.


우주 비행사들은 모든 것을 알지만 일절 개입하지 않는 무능한 신의 관점으로 지구라는 아름다운 구체를 짐짓 바라본다. 수많은 삶과 죽음에 대해 전혀 느끼는 바가 없다. 사실은 없는 것인지, 감각을 미뤄두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돌고 또 돌아가는 우주라는 공허 속에서 지금, 현재, 나는, 우리는, 단지 살아있다.




인천발 런던행 금속선에 탑승한 나 역시 창문 너머를 바라본다. 14시간에 걸친 비행, 소음과 소란에 무뎌지는 청력 속 문득 느낀 진공. 나는 무엇을 위해 상공을 가르고 있는 것인가. 새로운 것도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 익숙함을 뒤로한 채, 나는 무엇을 위해 공중을 거치고 있는 것인가. ‘왜’라는 질문을 던지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에게 진부하게 물었다.


그러나,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산과 바다, 흐린 점처럼 보일 듯 말 듯한 어떤 생명들. 무궁무진한 가능성일지 저물어가며 찾아오는 죽음일지 모를 어떤 존재들. 선 그어지지 않은 하늘길을 무난히 날아가는 수백킬로그램의 항공기. 그 속에 속한 나는 이유를 찾는 것을 멈추고 그저 존재하기를 다짐한다.




인간과 인류의 살아있음이 헛된 것이라 할 수 있는가. 살아있음은 수단도 아니고 목적도 아니다. 단지 살아 '있음' 그 자체일 뿐, 실존에는 그 어떤 이유도 따르지 않음을 받아 들인다.


궤도에 올라선 이상 유영하는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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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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