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는 죄책감의 연속이다. 그 죄책감이 물밀듯이 솟구치는 시간은 아이가 잠든 시간이다. 잠든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엄마는 오늘 못해준 일들이 떠오르면서 마음 속으로 잘못을 고해성사한다. 아이와 최선을 다해 놀아준 날은 마냥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반면 아이를 한번이라도 울렸거나 지친 마음에 조금이라도 역정을 낸 날에는 잠든 아이를 보면서 눈물을 글썽이기도 한다. 내일은 좀 더 잘하겠노라며 다짐을 하곤 한다.
신이 있다면 내일 더 아이에게 잘하라고 채찍질하기 위해 잠든 아이의 모습을 이토록 사랑스럽게 만들었나보다.
바라보고 있으면 너무 예뻐서 눈물이 절로 나는 순간이 그간 잠든 아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이었다면! 둘째를 갓 출산한 직후엔 눈물을 흘리는 구간이 2개 더 추가되었다.
하나, 조리원에 있는동안 떨어져 있게 된 첫째 아이를 만날 때다.
조리원에 있다보니 인형처럼 작은 아이들을 매일 만나다가 이제 7살이 되었다며 형님 티를 팍팍 내는 첫째를 보면,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나 많이 컸다는 것이 실감이 난다. 동생을 보고 "내가 우유 먹여주고 싶다. 너무 예뻐서 만져보고 싶다. 동생이랑 놀아주고 싶다" 라면서 받고 싶은 것보다 해주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는 첫째가 사랑스러워서 눈물이 난다. 엄마랑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도 동생을 원망하기는 커녕 동생을 위해 뭔가를 해주고 싶어하고, 엄마랑 떨어져도 늠름하게 독립적으로 잘 지내는 첫째의 모습을 보니 듬직해서 눈물이 난다. 그리고 사진을 보면 훌쩍 커버린 첫째의 시간이 아쉬워서, 지금 이 순간에도 함께 해주지 못해 눈물이 난다.
둘, 우연히 둘째와 눈을 마주쳤을 때다.
우리 부부는 오랫동안 딸을 원했다. 엄마의 평생 친구는 딸이라는 말, 아빠는 딸바보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첫째가 아들이었으니 둘째는 꼭 딸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컸다. 선물같이 찾아온 둘째, 하지만 둘째를 임신한 순간부터 딸을 더 간절하게 바라다보니 막상 아들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아쉬운 마음이 컸던 것이 사실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들이어서 아쉬운 것이 아니라, 딸이 없음에 아쉬웠다. 그래서 뱃속에 아이를 임신하고서도 "나도 딸이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러다가 둘째 아들을 만났다. 선물처럼 찾아온 우리 아기, 태어난 순간부터 나는 둘째를 사랑하게 되었다. 왜 뱃속에서 진작 더 아껴주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과 미안함이 아기의 얼굴을 볼 때마다 들었다. 오늘 조리원에서 수유를 하는 순간도 그랬다.
원래 신생아는 아직 눈이 덜 성숙해서 마주본다는 느낌이 잘 들지 않을텐데, 태어난지 이제 6일된 둘째에게 트림을 시켜주는 순간 우연히 눈이 딱 마주친 것이었다. 하루 종일 잠들어 있어서 얼마 되지 않는 깨어있는 순간에 엄마의 얼굴을 뚫어지듯 바라본 것이다. 아이의 눈에는 눈물이 촉촉히 젖어있었다. 세상의 때가 하나도 묻지 않은 순수 그 자체의 촉촉한 눈망울을 바라보는 나에게도 눈물이 맺혔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게 다행이었다. 옆에서 수유하던 엄마들이 갑자기 우는 나를 보면 이상하다 생각했을테니 말이다. 눈물을 흘리다가 코를 훌쩍하자 아이가 화들짝 놀란다. 신생아 난청 검사 결과 재검을 하라고 나와서 몇일동안 전전긍긍했는데 코를 훌쩍하는 소리에 아이가 반응한 것인지 놀랍다는 생각도 들었다. "엄마 마음 알아, 나 괜찮아" 하며 말하는 듯한 아이의 눈빛이 나를 반성하게 한다.
확실히 엄마의 죄책감은 아이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는 원동력이다. '너'가 아닌 '너희'로 부를 사랑스런 두 아들의 엄마로 하루 하루 행복하게 살고 있다. 아이들을 맑은 눈빛을 보며 오늘 하루 더 감사하고 내일 더 사랑하겠다는 다짐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