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육아, 가족 밸런스 찾기
아이를 낳아야 했고, 키워야 했기에 다른 대안은 없었다. 물론 일과 함께 육아와 살림을 할 수도 있었지만, 일 욕심이 많은 나란 걸 알기에 놓지 않으면 그 어느 것도 잘 할 수 없을 것이란 것을 알았는지도 모른다.
7년 전 난생 처음 가보는 낯선 도시로 남편이 발령을 받았다. 친정과 시댁도 멀리 있고 아는 사람도 하나 없는 곳이라 하루 종일 아이가 내가 만나는 사람의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방긋 방긋 웃어주던 아기였지만, 퇴근 하던 남편만 오롯이 기다리느라 육아로 바쁜 중에도 나는 고립된 느낌을 받았던 듯 싶다. 그래서 복직을 하는게 아이와 나에게도 좋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친정과 내 직장은 같은 도시였기에 남편과는 주말부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돌쟁이와 친정에 살면서 직장에 출근했고, 일하는 부모님의 도움을 받았다. 첫째가 15개월, 아이는 겨우 걸음마를 뗀 수준이었고 그렇게 어린이집에 들어갔다.
최소한만 일하고자 했던 나의 마음과, 일만 보면 먼저 해야 할 것 같은 활기가 돋는 내 몸은 다른 곳에 있었다. 마침 수업발표대회 공문을 보았고, 제목만 봐도 스쳐지나갔을 예전과는 달리 내용을 꼼꼼히 읽었다. 마침 지난 학교에서 수업발표를 몇 번 해본 경험이 있었던 것을 아셨던 교감선생님은 나에게, 수업도 탄력 받았을 때 제대로 한번 그간 배운 것을 정리해보라고 망설이던 나를 설득하셨다.
육아도, 남편과의 단단한 사랑도, 일도 모든 것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나였는데, 수업 대회에서 더 잘해내고 싶다는 마음이 컸던걸까. "이 시간만 지나면 될거야, 가족은 언제나 함께니까 나중에 더 잘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종종, 그러다가 자주 일이 내 삶에 중심이 되었고, 돌쟁이 아들과 멀리 떨어져 주말부부를 하던 남편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시간을 쏟아부은 육아, 시간을 쏟아부은 집안일은 당장에 결과물이 보이지 않기에 막막하고 어렵다. 해도 티가 잘 나지 않기 마련이다. 하지만 일은 달랐다. 열심히 하는 만큼 성과와 보상이 바로 드러났고, 나는 '수업'이라는 분야에서 나름 뛰어난 교사라는 평가를 받았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듯, 수업 연구에서 반응이 좋자 나는 더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다. 평가 기간이 되면 캐리어 가득 자료를 담아 하나하나 깨알같이 채점을 했고, 수업 과정 하나 하나에 정성을 기울였다. 수업을 열심히 준비할수록 학생들은 나의 정성을 알아주었고, 감동했고, 고맙게도 잘 따라왔다. 아직도 기억나는 그해 겨울, 나는 보고서 정리로 무척 바빴다. 학교에서 밤을 새고, 집 근처 카페에서 밤을 샌 끝에 보고서를 제출할 수 있었다. 벼랑 끝에 몰려야만 일에 집중이 되는 스타일이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수업발표대회는 준비할 것이 무척 많았다. 모든 선생님이 베테랑인 만큼 부족한 내가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으려면 열심히 하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머릿 속은 늘 수업으로 가득했다. 임용고사만큼이나 땀을 쥐게 하는 1차, 2차, 3차의 과정을 모두 거쳤다. 시대회 1등급의 자격으로 전국 대회에 출품했으며, 전국 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으로 수상했다. 노력 이상의 행운이 따라 좋은 결과를 맺은 것이 감사할 따름이었다.
수업발표대회 수상 이후 강의 문의가 전국에서 이어졌다. 교육부를 비롯해 크고 작은 무대에서 나름의 수업 사례를 알려달라는 요청이 많았다. 그럴수록 나는 컴퓨터 앞에 있는 일이 많았다. 커리어에서 만족한 엄마는 행복한 얼굴로 아이를 대할 수 있었지만,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은 많지 않아 늘 죄책감이 쌓여갔다. 가족을 위하는 일이라 늘 아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남편이었지만, 늘 둘이 시간을 보내는 데 익숙했던 남편은 바쁜 아내 앞에서 스스로의 취미를 찾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내 앞에는 4살로 부쩍 커버린 아들, 그리고 무뎌져버린 남편이 보였다.
잠시 멈춰서지 않으면 그 어느 것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을 알았다. 결국 나는 휴직을 선택했다. 3년 전의 일이다. 모든 요청은 휴직 앞에 자연스럽게 멈추었고, 나는 가족의 삶을 가운데 놓았다. 그리고 인생을 함께 쓰는 여행을 4살 아들, 그리고 남편과 시작했다.
세계 지도를 펴놓고, 가보고 싶은 나라에 점을 찍었다. 너무 많은 계획은 머리를 아프게 할 뿐이라는 위안을 삼고, 귀차니즘 부부는 출발 날짜만 정해진 항공권, 첫날 묵을 숙소만 정해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운전을 하는 날도 있었고, 어떤 날은 하루 종일 멍 때리며 서로 얼굴만 쳐다보는 날도 있었다. 4살 아들은 유모차에 실려 이곳 저곳을 많이도 다녔다. 자는 시간 빼고 부부는 수다를 떨었고, 이야기는 해도 해도 끝이 나지 않았다.
미국 동부 뉴욕에서 플로리다까지 비행기로, 차로, 배로 1달 반, 미국 서부와 중부를 종횡무진 자동차로 또 1달 반을 누볐다. 국내에 돌아왔지만, 여행 향수가 스쳐지나가면 부부 중 누구도 반대하는 법이 없이 바로 티켓을 끊었고, 준비없는 여행을 또 떠났다. 아랍에미레이트, 몰디브, 호주에 이르기까지 여행이 삶이던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코로나가 찾아왔고, 집이 결국 최고의 여행지라며 몇달 간은 집콕을 즐겼다. 코로나 백신이 일상화된 시기엔 낯설었던 서울을 배경으로 삶을 여행처럼 살기도 했다 있다.
성공과 여행, 그 어디쯤에서 우리 가족은 느긋느긋, 바쁨바쁨으로 서울라이프를 마무리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