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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산책 Oct 29. 2020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윈디가 있다

1) 수연과 윈디

수연은 서진과 헤어져 꼼뽀스텔라와 떨어진 한적한 바다 마을 묵시아에 도착했다. 바다를 보고, 파도 소리를 들으며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결국 꼼뽀스텔라에서 윈디를 만나지 못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에서 그녀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규칙적인 파도 소리, 밤하늘을 수놓은 별. 수연은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한 달 넘게 걸었던 일도 ‘그’와 함께한 8년이라는 시간도 모두 꿈만 같았다.     


수연은 등대를 향해 걷고 있다. 별똥별 하나가 떨어진다. 그녀는 그곳을 향해 걷는다. 

등대 밑 벤치에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보인다. 초록 눈의 그녀, 윈디다.

수연은 반가운 마음에 소리 내어 부르려다 말고 그저 윈디를 바라본다.

윈디는 하늘, 바다, 땅, 그리고 공기와 하나가 된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모습이 수연의 마음을 고요하게 했다.

수연은 조용히 다가가 윈디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갑작스러운 접촉에도 그녀는 놀라지 않고 뒤를 돌아보며 웃는다. 수연이 윈디 옆에 앉는다.

- 어서 와요. 수연!

- 윈디,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어요. 우린 같은 곳을 다니는군요.

- 아니요. 내가 당신을 찾아온 거예요.

- 내가 여기에 올 줄 알고 있었던 거예요?

- 그럼요.

- 어떻게요?

- 내가 당신이고, 당신이 나니까.

수연은 그 말에 놀라지 않는다. 그저 손을 올려 윈디의 얼굴을 만져볼 뿐이다. 윈디가 말한다.


- 당신에게 삶은 살만한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그’와 함께 했던 순간도 완전했고, 그 없이 사는 삶도 완전할 거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죠. 순례길을 걷기 시작할 때부터 말하고 싶었지만 당신은 자신의 괴로움에 몰입해 있더군요. 그때의 당신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지만 이제는 알고 있죠? 우리는 강해요. 우리는 삶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나아갈 준비가 되었어요.

- 당신은 나를 위해 온 거였군요?

- 나는 항상 당신과 함께 있었어요. 다만 현실적인 눈으로 보지 못할 뿐이죠. 당신 내면에는 스스로 상처를 치료할 힘이 있어요.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윈디’가 있답니다.

수연은 그동안 윈디와 나눈 이야기를 떠올려 보았다.

- 당신이 이미 알고 있는 거예요. 단지 내 입을 통해 다시 듣는 거뿐인 걸요.


- 그럼 이제 당신을 볼 수 없는 건가요?

- 나는 항상 당신과 함께 있어요. 당신이 그 사실을 잊지만 않는다면요.

- 잊지 않을게요.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두려워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윈디를요.

- 그래요. 감정을 흘려보내고, 지금 당장 행복을 선택할 수 있는 수연을 잊지 말아요.

수연은 윈디를 안았다. 엄마의 품처럼 포근한 그녀. 바로 나.    

 

수연은 파도 소리에 잠에서 깼다. 그녀는 침낭 속 얇은 이불을 끌어안고 있었다.

- 윈디

수연은 작은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휴대폰 불빛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서진이 보낸 문자와 사진이 와 있었다.

“수연, 나는 내일 아침, 한국으로 돌아가요. 여행 마무리 잘하고, 한국에서 만나요.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그리고 문자 밑 사진 속에 윈디가 있었다.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 서 있는 서진 옆의 수연. 그녀가 바로 윈디였다.     



2) 수연과 서진

한국으로 돌아온 지 3개월이 지났다. 수연과 서진은 2주에 한 번씩 만나 북한산 둘레길을 걸으며 스탬프 투어를 하고 있다. 그들에게 걷는 것은 단지 신체활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대화하는 시간보다 침묵하며 걷기 자체에 집중하거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면서도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주의를 기울이며 동료와 함께 하는 든든함을 느꼈다.


오늘은 3번째 만남으로, 21구간 오봉 전망대에 올랐다. 숨을 몰아쉬며 전망대에 다다르자 갑자기 바람이 불어온다. 수연은 이 바람이 그녀라는 걸 안다. 초록 눈의 그녀가 보고 싶지만 윈디는 수연의 내면에 있다.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쉰다. 마치 공기 속에 가득 찬 사랑을 마음껏 마시는 것처럼.

서진이 물었다.

- 책은 잘 되고 있어요?

- 네.

- 듣기 좋네요. 망설이지 않고 바로 대답하는 거.

- 잘 될 거예요. 그렇게 믿고, 두려워하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어요.

수연은 윈디를 만난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고 있다. 그녀가 주저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녀 안에 있는 긍정의 윈디 덕분이다.      

당신 내면에는 스스로 상처를 치료할 힘이 있어요.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윈디가 있답니다.


수연은 자신을 일으켜 세우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있게 해 준 메시지들을 여러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 책이 출간되면 서진에게 가장 먼저 보내주기로 했다.

- 서진 씨는 어떻게 지냈어요?

- 아내와 서류 정리를 끝냈어요. 아이는 1주일에 한 번씩 만날 수 있구요.

- 기분은 어때요?

- 괜찮아요. 끝이 나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관계를 정리하는 일이 꼭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은 아니었네요. 각자 더 행복해지려고 선택한 거니까. 내가 행복하고 싶은 것 못지않게 아내도 행복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아이 엄마이기도 하니까요.

- 아내를 축복하는 마음이 생긴 거네요. 그 정도면 무슨 일이든 받아들일 수 있겠는데요. 수행하는 사람 같아요.

서진이 웃으며 말한다.

- 우리는 걸으며 수행하는 사람들 아니었던가요?

- 맞아요. 우리는 걷기 수행 중이죠.

그들은 큰 산을 넘었다고 생각했다. 인생은 오르막길, 내리막길, 평지 길, 진흙 길 등 다양한 길들의 연속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길 위에서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도.


서진이 말했다.

- 지금의 나는 괜찮아요. 앞으로의 나도 괜찮을까요?

- 그럼요. 방법이 있어요.

- 뭔데요?

- 평생 걸어요. 걸으면서 생각해요. 그렇게 계속 단련하자구요.

서진이 웃으며 묻는다.

- 그냥 걷기만 하면 되나요?

- 어떤 날은 음악을 들으며 걷고, 어떤 날은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걸어요.

-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면서요?

- 맞아요. 바람의 감촉을 느끼고, 흙냄새를 맡으면서 걸어요.

- 현존이군요.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 네.


수연은 12월의 차가운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펴고 팔을 벌리며 숨을 깊게 들이쉰다. 그녀를 보고 서진이 웃는다. 수연이 말한다.

- 긴 호흡으로 세상을 보면 좋겠어요. 오늘처럼 산 하나만 걸어도 올라갔다 내려갔다 힘들었다 편안했다 하는데 인생은 오죽할까요? 그러니 두려움을 버리고 저항하지 말고 살아요. 그저 최선을 다하면서. 그러면 되지 않겠어요?

서진이 고개를 끄덕인다.

- 수연 씨, 수영할 줄 알아요?

- 아니요.

- 깊은 물 위에선 구명조끼 없이도 몸에 힘을 빼고 배를 내밀면 둥둥 뜰 수 있어요. 두려움을 버리고 저항하지 말고 살라고 하니까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내 모습이 떠오르네요.

- 멋진데요. 그 장면 속 서진 씨 표정은 어떤가요?

- 웃고 있어요. 편안하게. 그저 물이 나를 받쳐주는 것을 느끼면서 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 같아요.

- 나도 꼭 해보고 싶네요.

- 같이 해요. 북한산 둘레길을 마치면 우리 수영으로 수행해 볼까요?

수연과 서진이 함께 웃는다.


- 앞으로도 수연 씨가 동행해 주면 좋겠어요.

수연이 웃으며 대답한다.

- 그럴게요. 굴곡진 인생 중간중간에 서로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은 거죠.

- 그런데 상처 받은 두 사람이 함께한다고 해서 성공적인 관계가 된다는 보장은 없어요. 오히려 실패할 확률이 높을 수 있는 거 알아요? 그래도 함께 할 수 있겠어요?

- 그래서 함께하려고 하는 거예요. 우린 둘 다 관계에서 성공이란 없는 걸 알잖아요. 각자의 길을 가면서 느꼈던 것들을 지속적으로 나눌 수 있다면 그걸로도 우리의 관계는 충만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게 내가 생각하는 동행이에요.

수연의 말이 서진의 마음에 와 닿았다. 특별한 관계가 되기 위해 상대방에게 모든 것을 맞춰야 하는 것인가 고민하던 서진은 그녀에게만큼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일이 가장 자연스러울 거라고 생각했다.

수연은 생각한다.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이 수순이라면 그것 역시 받아들이면 된다. 이 사람을 좋아하지만 그도 내 행복의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내 행복은 내가, 그의 행복은 그가 선택하는 것이다. 다행히 우리 둘 다 그것을 알고 있다.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동반자, 그와 함께 하는 삶은 더 충만해질 것이다.’     


두 사람은 소나무 쉼터로 내려와 근처 식당에서 따뜻한 만두전골을 먹는다.

- 서진 씨, 시원한 막걸리 한 잔 어때요?

- 좋아요.

그들은 앞에 놓인 음식을 먹으며 마음껏 행복해한다. 지금 여기에서 누리고 있는 것에 감사하고 행복하기를 실천 중이다.

새로 생긴 우이신설선을 타고 각자의 보금자리로 돌아간 그들은 충전의 시간을 갖고 내일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오늘 그랬던 것처럼 그저 최선을 다하여.


끝!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커버 이미지 출처: pixn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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