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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산책 Oct 29. 2020

용서는 자신을 자유롭게 한다

1) 서진과 신부님 1

서진은 아스토르가에서 출발하여 라바날 델 까미노까지 걸을 생각이다. 친구는 오늘의 목적지에 있는 수도원에 한국인 신부님이 있으니 만나서 ‘나눔의 시간’을 가져보라고 이야기했다. 무슨 얘길 듣는다고 서진의 마음이 180도 변하는 것은 아닐 테지만 달리 계획도 없으니 흘러가는 대로 내맡겨보기로 한다.


지루한 메세타 지역이 끝나고 새로운 전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레온의 산맥들, 나지막한 산과 짙은 황토색의 밭. 서진은 전보다 주변 환경에 관심을 기울이며 걷고 있다. 예전에는 자신의 발과 걸어야 할 길에 시선을 두었다면 지금은 하늘, 산, 나무 등 자연환경과 그와 만났다 헤어지길 반복하는 순례자들에게 시선이 갔다.

‘저 사람들은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마라가떼리아 마을 건물(출처: 대한민국 산티아고 순례자 협회)

라바날 델 까미노에 도착해 숙소를 잡고 마을을 둘러본다. 마라가떼리아 마을 특유의 붉은 돌로 지어진 오래된 건물들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서진뿐만 아니라 많은 순례자들이 마을이 주는 평안함을 누리며 걷거나 쉬고 있다.


서진은 ‘나눔의 시간’을 갖기 위해 수도원으로 향했다. 그를 포함하여 5명의 한국인이 신부님을 만나기 위해 모였다. 신부님은 모인 사람들에게 ‘순례길에 오른 이유’를 물었다. 이유는 제각각이었지만 삶의 문제가 아닌 더 나은 삶이나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서진의 차례가 되었을 때 그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수연의 말이 생각나 대답했다.

- 저를 사랑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신부님은 미소 짓더니 순례길과 자기 사랑과의 관계를 물어보았다.

- 걸으면서 저를 사랑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려고요.

- 자신을 사랑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 사실은...

서진은 아직 담담하게 아내가 그와 헤어지길 원한다는 말을 하기 쉽지 않았다. 지난번 숙소에서는 술김이기도 했거니와 한국 사람은 수연뿐이라 걸러지지 않고 나왔지만 지금은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 말하기 힘들면 하지 않아도 됩니다. 각자 이유가 있고, 본인이 가장 잘 알겠지요.


신부님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을 잇는다.

- 여러분이 이곳에 온 이유는 서로 다르지만 앞으로의 삶이 더 평안하고 좋아지길 바라는 마음은 같을 겁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주제는 ‘용서’입니다. 살면서 용서하기 힘든 일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겁니다. 여기에도 그런 경험 때문에 힘든 사람이 있을 수 있겠죠.

신부님은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말한다.

- ‘용서’란 피해자가 의도적이며 자발적으로 감정의 변화를 통해 공격적인 마음과 같은 부정적인 정서를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용서는 시간을 둔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피해자 본인이 스스로 해야 하는 겁니다.

서진은 ‘의도적이며 자발적으로’라는 단어를 듣고 뭔가 목에 걸린 느낌을 받는다. 아내에 대한 원망에 사로잡혀 이 길 위에 선 그는 자신에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말에 반감을 느낀다. 고작 이런 말을 듣겠다고 여기 앉아있는 것인가 회의가 들었을 때 50대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말했다.

- 신부님, 피해자가 그런 마음이 들 수 있을까요? 의도적인 마음의 변화라니 그건 너무 힘들 것 같습니다.

- 그런가요? 우리가 이곳에 온 목적을 생각해보세요. 이곳이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지구일 수도 있고, 여기 순례길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여기에 존재하는 이유가 뭘까요?

- 신부님, 저는 존재의 이유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존재하니까 살아가는 거 아닐까요?

20대 중반의 청년이 자신 있게 대답한다.

- 그렇다면 존재의 이유가 없으니 삶은 가치가 없는 것인가요?

- 아니요. 이유가 없다고 해서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신부님은 확고한 신념으로 가득 찬 청년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서진은 신부님과 여기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대화가 오갈지 흥미를 느낀다.     




5-2) 서진과 신부님 2

신부님이 청년에서 물었다.

- 그렇다면 형제에게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입니까?

청년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존재의 이유가 없는 삶은 가치가 없느냐는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옆에 앉은 60대 남자가 대답한다.

- 신부님, 함께 사는 삶이 가치 있는 삶 아닐까요?

- 그렇다면 함께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건가요?

-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 왜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야 할까요?

50대 여성이 대답한다.

- 안 그러면 사는 게 팍팍합니다. 신부님!

둘러앉은 사람들이 소리 내어 웃는다.

신부님도 같이 웃다가 서진을 향해 물었다.

-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도와주려고 할 때 마음의 밑바탕에는 어떤 감정이 자리 잡고 있을까요?

서진의 머릿속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지만 대답하지 못했다.

아까 말하지 못했던 청년이 대답한다.

- 사랑입니다.

- 맞습니다. 사랑입니다.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사랑입니다. 여러분이 여기에 온 이유도 사랑이며, 앞으로 살아갈 삶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도 사랑입니다. 사랑은 온 인류가 지향하며, 살아있는 모든 생명에게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있구요.


신부님은 미소를 지으며 잠시 쉬었다가 사람들을 둘러보며 이야기한다.

-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남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사랑이 없는 희생은 제 살을 깎는 느낌일 거예요.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희생은 그 자체로 큰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것처럼요. 예수님은 스스로 사랑 안에 거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자기 자신을 무척 사랑하셨을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희생이 더 가치 있게 느껴지는 거구요. 사랑은 우리 삶의 보편적인 가치입니다.

신부님은 말을 멈추고 물을 한 모금 마신다.

- 하지만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그 마음은 상대를 향하고 있는 것 같지만 오히려 자신을 찌르는 고통이 있어요. 그 고통 때문에 복수를 꿈꾸기도 하지요. ‘나처럼 상대방도 고통받게 해 주세요.’라고 빌게 됩니다.

서진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그도 아내가 고통받기를 원하는가? 그렇다. 자신이 고통스러운 만큼 그녀에게도 고통이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 하지만 그런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건 여러분 영역이 아니에요. 붙잡고 있어 봐야 본인만 괴로울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용서하는 겁니다. 그냥 그렇게 해버리는 거예요. 자발적이고, 의도적으로. 나를 고통에서 해방시키고 치유할 수 있도록 약을 발라주는 행위가 용서입니다. 그것은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니에요. 자신을 위한 겁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어요. 복수를 꿈꾸는 상대를 가슴 한편에 두고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요?

신부님은 마치 서진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신부님은 서진에게 그만 아내를 원망하는 마음에서 벗어나라고 말하고 있었다.


- 자신이 단죄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복수하고 싶은 고통 속에 갇혀 있는 그 마음을 자유롭게 놓아주세요.

신부님은 잠시 말을 쉬고, 사람들을 둘러본다.

- 하지만 상대를 용서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용서해야 합니다. ‘내가 왜 그랬을까?’ 하며 자책하는 마음에서 벗어나는 게 먼저입니다. 그래야 상대를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어요. 그러니 용서의 밑바탕에도 사랑이 있는 겁니다. 나에 대한 사랑이 더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확장되는 거예요. 그러니 용서하세요. 더 나빠지지 않아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용서하지 못해 괴로운 상태에 머물러 있지 말고, 자신을 사랑하는 나로 살아가세요.

신부님이 다시 말을 멈추고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한다.

- 용서하고, 기도하세요. 내가 나를 더 사랑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그런 바람은 이루어집니다. 사랑의 힘이 자신을 일으켜 세울 테니까요.

서진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한다.

‘아내를 용서하게 해 주세요. 제가 저를 사랑하게 해 주세요.’       




5-3) 서진

서진은 저녁 7시 수도회 미사에 참석하여 ‘그레고리안 성가’를 들으며 기도했다. 성가는 그에게 경건한 마음으로 용서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이 전과 달라졌음을 느꼈다. 머리와 가슴을 짓누르던 원망의 마음이 줄어든 것이다. 그는 마음이 편안해지자 아내의 입장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아내는 나와 사는 동안 나를 원망했겠구나!’

수연이 자신에게 편안해지길 기원했듯이 그도 아내가 편안해지기를 바랐다. 아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그를 떠나기로 결정했을 거라는 독일인 남자의 말이 떠오르자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할 줄 알게 된 거네.’

그는 마음을 털어내듯 한숨을 내쉬었다.     


일과를 마친 신부님이 서진이 묶고 있는 알베르게로 찾아왔다.

- 오늘의 나눔이 당신에게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길 기도했습니다.

- 감사합니다. 신부님.

- 용서하셨나요?

- 어떻게 아셨습니까?

신부님은 미소를 띠고 말했다.

- 순례길에는 당신과 같은 이유로 걷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나는 같은 메시지를 전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에요. 당신 스스로 자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삶을 살기 원했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겁니다. 나는 단지 당신을 조금 도와준 것뿐입니다.

- 사랑의 마음으로요?

- 맞습니다. 사랑으로. 자신을 먼저 존중하세요. 존중받는 내가 누구에게든 함부로 할 수 있을까요? 자신을 존중하는 것부터가 자기 사랑의 시작입니다.

- 감사합니다. 신부님.     

철의 십자가(출처: 대한민국 산티아고 순례자 협회)

새벽을 맞이한 서진의 마음은 어젯밤보다 가벼워져 있었다. 그는 몰리나세까로 가기 위해 출발한다. 순례길 중 가장 높은 포세바돈을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철의 십자가’에 도착했다. 5m 정도의 지주 위에 철로 된 작은 십자가가 있고, 그 밑에는 돌이 언덕처럼 쌓여있었다. 순례자들의 소망을 담은 돌들이었다. 근처에는 돌이 없어 이곳을 지나기 전에 작은 돌을 챙겨 오거나 자신이 남기고 싶은 기념품을 가지고 가야 한다. 서진은 철의 십자가 앞에 서서 다시 한번 기도한다.

‘아내를 용서하겠습니다. 제가 저를 사랑하게 해 주세요.’


그는 여러 순례자들이 쌓아놓고 간 돌이나 기념품을 둘러보다가 한글로 적힌 쪽지를 발견했다.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하게 해 주세요.”

“준비하고 있는 시험에 합격하게 해 주세요.”

여러 가지 소망 중에 마음을 사로잡는 글귀가 있었다.

“감정을 흘려보내겠습니다. 그를 용서하고, 지금 여기, 이 순간을 살겠습니다.”

서진은 그 쪽지가 수연이 쓴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 남자를 용서함으로써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 같았다. 그녀의 쪽지가 그에게 용서의 길로 안내하는 순례길의 노란 화살표나 조개껍질 같은 표식으로 느껴졌다. 서진은 그녀의 쪽지 옆에 자신도 글을 써서 붙여 놓았다.

“아내를 용서합니다. 나를 사랑합니다.”


서진은 체력적으로 순례길 중 가장 힘든 상태였으나 마음만은 홀가분했다. 자신도 모르게 길 위에서 휘파람이나 콧노래를 부르며 자유로운 마음 상태를 즐기고 있었다. 포르세돈과 철의 십자가를 뒤로 하고 넘은 산은 풍경이 아름다웠다. 그동안에도 아름다운 대자연이 펼쳐져 있었으나 이제야 그는 감탄하며 길을 걷는다.


‘상황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달라 보인다. 마음의 문제였구나!’


서진은 27일간 걸어왔다. 앞으로 열흘 후,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꼼뽀스뗄라에 도착할 것이다. 그동안 목적도 없이 걸으면서 방황했던 날들이 오늘과 같은 날을 맞이하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다음 편에 계속...


* 커버 이미지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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