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아에서 아침 일찍 출발한 수연은 오전 11시 전에 최종 목적지가 100km 남았다는 표시석을 마주했다. 그녀에게 800km의 순례길은 중간에 포기해도 이상할 것 없는 벅찬 도전이었지만 이제 단 100km만 남은 것이다. 그녀는 감회가 새로웠다. 순례길을 걷기 시작할 때의 불행했던 수연은 이제 없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 행복을 선택할 수 있고, 지금 여기에 존재함으로써 더욱 기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다.
그녀는 밝게 웃으며 표시석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페레이로스로 가는 길은 상쾌한 숲길로 신비한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그녀는 맑은 공기와 선명한 신록을 마음껏 즐기며 숲에서 나는 달콤한 흙과 풀냄새를 들이마셨다.
뽀르또마린 숙소에 도착한 수연은 마지막 여정을 위해 이곳에서 몸과 마음을 충분히 쉬기로 한다. 그녀는 숙소에 들어가 자신의 팔과 다리를 부드럽게 주무르며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근처 식당으로 갔다. 이 지역의 유명한 비스꼬초 파이(아몬드와 밀가루, 계란, 설탕을 넣은 생일 케이크 같은 빵)와 아구아르디엔떼(스페인 전통 브랜디)를 주문한다. 파이를 한 입 베어 물고, 술을 한 모금 마시니, 입안에서 달콤함과 쌉싸름한 맛이 어우러진다.
- 수연, 축하할 일이 있나 봐요?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 윈디!
- 행복해 보이네요.
- 네. 제가 선택했어요.
-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요?
- 없어요. 이유가 없어도 행복을 선택할 수 있죠.
- 좋네요.
-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건가요?
- 나를 기다리고 있었나요?
- 이 여행이 끝나기 전에 당신을 한 번 더 만나고 싶었어요.
- 왜죠?
- 글쎄요. 당신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즐거워요.
윈디가 미소 지으며 말한다.
- 당신이 이미 알고 있는 거예요. 단지 내 입을 통해 다시 듣는 거뿐인 걸요.
- 그런가요?
- 물론이죠. 행복한 당신을 위해 건배할까요?
- 윈디, 당신을 위해서도요.
윈디가 눈을 찡긋하며 말한다.
- 내가 당신이고, 당신이 나니까. 살룻!(salud, 건배)
윈디에게서 기쁜 감정이 느껴졌다. 그녀를 처음 봤을 때는 아무 감정도 읽을 수 없었는데 오늘은 두 번째 만났을 때보다 더 행복해 보인다. 어쩌면 윈디가 변한 것이 아니라 수연이 변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거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 수연, 돌아가서 하고 싶은 일이 있나요?
- 일단은 그에게 작별을 고하고, 그 외에는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윈디가 고개를 끄덕이고 브랜디 한 모금을 마시며 묻는다.
- 수연,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해 본 적 있나요?
-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어렸을 때 저를 돌봐주신 분이죠.
- 그때 어떤 생각을 했어요?
- 무척 슬펐어요. 죽음은 완전한 이별이구나! 영원히 살 것 같지만 죽음은 삶과 가까이 있구나!
갑자기 윈디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 수연, 우린 언제 죽을지 몰라요.
수연은 윈디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 궁금해하며 걱정스럽게 그녀를 바라본다.
수연과 윈디는 숙소 근처에 있는 벤치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이어간다.
- 왜 갑자기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죠?
수연이 윈디에게 물었다.
- 죽음도 갑자기 오니까요.
- 윈디, 당신은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 아니었나요?
- 맞아요. 나는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자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죠. 하지만 내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죽음이 우리 가까이 있기 때문이에요.
- 좀 무서운데요.
- 수연,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온전하게 맞이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 글쎄요.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런 사람은 드물겠죠.
- 우리는 삶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어요. 그러니 삶이 무한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현재의 삶에 충실해야 해요.
- 그렇게 극단적으로 죽음까지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요?
윈디가 수연을 바라보고 미소 짓는다.
- 수연, 당신이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나요?
- 네. 글을 쓰고, 책을 출간해보는 거요.
- 시도하고 있나요?
- 아니요.
- 언젠가는 시작할 건가요?
- 글쎄요.
- 왜 망설이고 있는 거죠?
-...
- 수연은 자신에게 충분한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기회가 되면 하고 싶다는 거예요.
- 기회가 없으면요?
-...
- 사람들은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언젠가 기회가 되면 해야겠다고 생각해요. 뒤로 미루면서 소심하게 행동하죠. 그래서 * ‘죽음’을 조언자로 삼으라는 거예요.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면 하고 싶은 일에 대해 망설일 시간은 없을 테니까요.
-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하고 싶은 일을 못할 이유가 없다는 거네요.
- 맞아요. 삶을 충실하게 살게 되죠. 매 순간 바르게 판단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 그런데 윈디, 거꾸로 삶을 포기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면요.
윈디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수연에게 묻는다.
- 그런가요? 수연, 당신은 어떨 것 같아요?
- 괜한 질문이네요. 내일 죽는다면 오늘을 의미 있게 살고 싶을 것 같아요. 그리고 행복하게.
윈디가 만족스러운 듯 환하게 웃는다.
- 그런데 윈디, 매 순간 치열하게 사는 게 행복할까요?
- 자신을 다그치라는 뜻이 아니에요. ‘죽기 전에 후회하는 것’과 관련된 책이 많이 있죠? 끝을 앞에 두고 하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 말고, 지금 여기에서 가슴 뛰는 삶을 살라는 뜻이죠.
- 가슴 뛰는 삶이라... 하지만 노력해도 안 되는 일들이 있잖아요.
- 무슨 성과를 낸 삶만이 성공한 삶이고, 행복한 삶이라는 편견에서부터 벗어나야 해요. 결과가 좋다면 좋겠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충실하게 살아가는 과정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걸요. 이건 비밀인데 당신에게 말해 줄게요. 사실 행복한 감정으로 충실하게 하는 일은 결과도 좋답니다. 그러니까 두려워하지도 망설이지도 말고 가슴 뛰는 삶을 살아요.
수연은 윈디의 말을 따라 해 본다.
- 두려워하지도 망설이지도 말고 가슴 뛰는 삶을 살아라.
그때 멀리서 걸어오는 서진의 모습이 보인다. 수연은 벤치에서 일어나 서진에게 다가간다.
- 수연 씨, 또 만났네요.
- 반가워요, 서진 씨. 오늘 여기에서 묵을 건가요?
- 네. 수연 씨도요?
- 네. 지금은 친구랑 얘기 중이니까 이따가 만나서 함께 식사해요.
- 그래요.
- 서진 씨, 편안해 보여요.
- 네. 마음의 변화가 있었어요. 이따가 말해 줄게요.
- 이따 봐요.
수연은 벤치로 돌아오고 서진은 숙소로 들어간다.
다음 편에 계속...
* 커버 이미지 출처: pxfuel
* 죽음을 조언자로 삼다 출처: <익스틀란으로 가는 길: 카를로스 카스타네다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