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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산책 Oct 29. 2020

나는 내 삶을 살아가면 된다. 그저 충실하게

1) 수연과 서진

서진은 사리아에서 한국 라면과 김치를 사 가지고 왔다. 700km를 걸어오면서 쉽게 만날 수 없는 라면을 본 순간 여러 개를 사서 사람들과 나누어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예전의 그라면 누군가와 나누는 일에 인색했겠지만 이제 작은 것부터 나누며 사랑을 실천해보고 싶었다.

- 와! 라면 냄새. 라면이 이렇게 큰 기쁨을 줄지 몰랐네요. 침 넘어가요.

두 사람은 국물까지 말끔하게 비우고 서로의 그릇을 보며 큰소리로 웃었다. 그들은 밖으로 나와 숙소 앞 벤치에 앉았다.


- 이제 말해 봐요. 어떤 일이 있었던 거예요?

서진은 신부님을 만나 용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고 말했다.

- 그래서 아내 분을 용서한 거예요?

- 네. 복수를 꿈꾸는 상대를 가슴 한편에 두고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는 신부님의 말씀을 듣고 아내를 놓아주기 전에는 나를 사랑할 수 없겠구나 생각했어요.

- 음. 마음이 미움으로 가득 차 있을 테니까 사랑이 없는 게 당연하겠네요.

- 그리고 아내도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나를 떠나기로 결심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수연은 ‘그’가 떠올라 씁쓸하게 웃었다.

- 그럼 아내 분이 가시는 길을 축복해줄 마음의 준비가 되신 건가요?

- 글쎄요. 축복은 아직 모르겠지만 더 이상 원망하지는 않으려구요.


- 지금 서진 씨 마음은 어때요?

- 용서하고 나니 오히려 편안해졌어요. ‘절대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이건 내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생각했었는데. 용서하기로 마음먹으니까 그렇게 되더라구요. 30여 일 가까이 걸어오면서 나만 빼고 다른 사람들은 답을 찾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래서 더 힘들었는데 이제 나도 조금 홀가분해졌네요.

- 다행이에요.

- 오는 길에 ‘철의 십자가’에서 쪽지를 봤어요. “감정을 흘려보내겠습니다. 그를 용서하고, 지금 여기, 이 순간을 살겠습니다.” 수연 씨가 쓴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 맞아요. 나예요.

- 그럴 줄 알았어요. 수연 씨 쪽지가 용서의 길로 안내하는 노란 화살표처럼 보이더군요.

- 나를 위해 쓴 건데 서진 씨에게 도움이 됐다니 기쁘네요.

- 수연 씨 스스로 용서의 길을 걸었으니 대단해 보여요. 나는 신부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직도 원망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을 거예요.

- 나도 친구의 도움을 받았어요. 아까 벤치에 같이 앉아있던 친구요.

- 그랬군요. 보지 못했어요. 기다렸다가 인사라도 하고 들어올 걸 그랬네요.

- 이 숙소에 묵기로 했으니까 만나면 인사시켜 줄게요.

- 그래요.

- 아까 그녀와 나눈 이야기는 삶과 죽음에 관한 거였어요.

- 거창한데요.

- 그런 건 아니고, 언제 죽음이 올지 모르니 가슴 뛰는 삶을 살라는 조언이었죠.

- 지금 하고 싶은 일을 미루지 마라?

- 네. 맞아요. 하고 싶은 일을 미루지 말고, 망설이지 말고, 소심하게 행동하지 말라구요.

- 수연 씨는 진취적인 사람이 되겠군요.

- 어쩌면요. 나에게 부족한 부분이었거든요. 그렇게 살아보고 싶어요.

두 사람은 이야기를 마치고 각자 방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한다. 자신과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을 만나 회복하고 성장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서로에게 큰 힘이 되고 있었다.           




2) 수연

수연은 아침 일찍 일어나 출발할 준비를 한다.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식당에서 나오는 길에 식사를 하러 들어오는 서진을 만났다. 서진도 떠날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녀는 그를 보자 윈디를 소개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 옆방으로 들어가 안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윈디는 없었다. 실망한 수연은 윈디가 체크아웃을 했는지 물어보았다.

- 윈디라는 사람은 없는데요.

- 없다구요?

- 어느 나라에서 왔죠?

- 모르겠어요.

- 성은요?

- 모르겠어요.

- 윈디라는 사람은 명부에 없어요.

수연은 어리둥절했다. 윈디는 분명 이 숙소에 머문다고 말했다. 어제 수연과 이야기를 나눈 후, 함께 들어왔는데 그녀의 이름이 없다니. 그녀는 윈디라는 이름이 가명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윈디와 그녀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윈디는 수연을 위로해주고, 희망을 주고, 의식을 고양시켜 주었다. 오직 도움만 받았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앞으로 남은 6일 중 윈디를 만나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수연은 길에 오른다. 오늘부터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녀가 출판사에서 근무한 지 10년째가 되었다. 책을 읽고, 글 쓰는 것을 좋아했던 그녀는 자신의 진로에 대해 별다른 고민 없이 출판사에 취직했다. 하지만 그녀가 하는 일은 책 만드는 일에 도움을 줄 뿐, 좋아하는 종류의 책을 더 많이 읽거나 의미 있는 글을 쓰는 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언젠가는 자신만의 글을 쓰고, 그것을 묶어 책을 만들고 싶었지만 먼 미래에나 생각해 볼 일이라고 미뤄두었다.


출판사에 근무하면서 느낀 것은 세상에는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잘 쓴 글이라도 제대로 된 홍보 없이는 세상에 노출조차 되지 않았다. 반면에 유명인들은 글을 잘 쓰지 않아도 유명세 덕분에 이야기를 조금 손봐서 시장에 내놓으면 쉽게 작가가 되었다. 이런 출판업계의 구조를 잘 아는 수연은 오히려 글 쓰는 일에 위축되었다. 책을 출간하는 일은 자신과는 거리가 먼 일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온 것이다.


하지만 이제 관점을 달리하여 글을 쓰고, 직접 출판하는 사람이 되면 어떨까 생각한다.

독립 출판


글 쓰는 일과 책 만드는 과정이 즐겁다면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 도전해보고 싶다. 결과에 대해 염려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해보고 싶어 진 것이다. 나름 출판 전반에 대한 지식이 있으니 마케팅에 대해 공부하면서 조금씩 준비한다면 자신이 못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의 수연은 그저 주어진 삶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않고, 안정된 삶을 추구하며 살았다. 그녀는 이제 그러한 태도를 버리고, 스스로 삶을 선택하며 살아보기로 결심한다. 여행이 그녀의 감각을 깨워주고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 일상 속에 산다면 이런 마음이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녀는 여행 기록을 적어두는 수첩을 꺼냈다.


“잊지 말 것,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 – 독립출판”


그녀가 여행을 떠나온 것은 순전히 그가 준 괴로움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여행이 그녀의 의식을 바꿔놓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계기를 준 그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그를 진심으로 축복하고 놓아줄 때가 된 것이다.


‘나는 내 삶을 살아가면 된다. 그저 충실하게.’


수연은 보폭을 크게 하며 힘차게 걷는다. 등에 진 짐도 그리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다.


다음 편에 계속...


* 커버 이미지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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