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내가 헤어지자고 했습니다. 이제껏 내가 살아온 삶이 부정당한 기분이에요. 나는 열심히 살았습니다. 배신을 당한 거죠.
아내와 순례 중인 60대 독일 남자가 말한다.
- 힘들겠군요. 당신은 성실한 사람인가 보네요.
- 네. 그건 자신합니다.
독일인 아내가 묻는다.
- 당신 아내는 어떤 사람인가요?
서진은 한동안 생각하다 대답한다.
- 그녀도 성실한 사람이죠.
독일인 아내가 말한다.
- 성실함이 부부관계를 유지시켜 주는 건 아니군요. 그럼 당신은 아내를 위해 어떤 노력을 했나요?
- 나는... 나는 돈을 벌어다 줬습니다.
- 다른 건요?
- 다른 건... 기억나지 않네요.
- 그렇군요. 아내가 뭘 좋아하는지 알고 있나요?
- 아니요.
서진은 술이 주는 감상에 젖어 아내를 원망하는 마음과 억울한 마음으로 따지듯 물었다.
- 나도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는데 아내가 뭘 좋아하는지 알아야 합니까?
독일인 아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묻는다.
- 그럼 당신 아내는 나쁜 사람인가요?
- 당연합니다. 나쁘고 말고요. 나에게 미리 말을 해줬어야죠. 내가 뭘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 아내는 나에게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다구요.
- 아내가 미리 말했다면 당신은 그녀의 말을 따랐을까요?
-...
서진은 아내가 무슨 말을 했더라도 자신의 뜻대로 살았을 것이다. 어쩌면 아내는 그동안 서진에게 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에게 이야기해도 달라지는 것이 없으니 결국엔 침묵을 선택했던 게 아닐까? 아내가 이해되면서도 그녀에 대한 원망은 줄어들지 않았다.
서진을 지켜보는 수연은 그도 자신과 같은 이유로 떠나왔음을 알았다. 그녀는 자신이 느낄 수 있게 된 평안을 그도 누릴 수 있기를 기원했다.
독일인 남자가 부드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 내가 착한 사람이라고 해서 나와 헤어진 사람이 나쁜 사람일까요? 그냥 서로 다른 겁니다. 그 다름을 인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 아내는 불행했던 게 아닐까요? 그녀가 행복을 찾아 떠난 거라고 생각하면 어때요? 그럼 당신 마음이 조금 편안해질 텐데요.
독일인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아내의 손을 잡았다. 그의 아내가 남편을 보고 미소 짓는다. 그가 말했다.
- 나도 첫 번째는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실패가 도움이 됐어요. 내 중심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에 조금 능숙해졌거든요. 그리고 주변에도 관심을 가지려고 노력하다 보니 지금의 아내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알아가는 일과 받아들이는 일을 놓지 않으려고 해요. 그런 삶의 방식이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20년째 살아가고 있어요.
독일인 남자가 말을 마치고 자신을 바라보는 아내와 가볍게 입을 맞췄다.
서진은 그들의 모습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자연스레 상대방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일이 그들에게는 일상적인 일로 보였다. 서진은 아내에게 주의를 기울인 적이 있었던가? 그런 순간이 없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편안하게 아내와 살아갈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왜 스스로 채찍질하며 미래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행복을 위해 살아온 걸까?’
서진은 아내에 대한 원망을 잠시 내려놓고 자신을 돌아본다.
2) 수연과 서진 그리고 프랑스 순례자
다른 순례자들은 잠을 자러 들어가고, 프랑스인과 수연, 서진만 남았다. 술에 의지해 원망의 말을 쏟아내다가 오히려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가진 서진은 차분한 마음이 되어 있었다.
수연은 서진에게 연민을 느꼈다.
- 당신이 편안해지면 좋겠어요. 나도 당신과 같은 이유로 떠나왔지만 지금은 많이 편안해졌거든요.
- 그래 보여요. 나랑 같은 이유가 있었던 사람으로 보이지 않네요.
프랑스인이 말한다.
- 둘 다 실연의 상처를 극복하고 싶어 온 거군요.
- 그럼 당신은 왜 이 여행을 선택한 거죠?
서진이 그에게 물었다.
- 난 프로그래머예요. 친구와 함께 창업을 했죠.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친구와 나는 일에 대한 가치관이 달라 매사에 부딪혔어요. 우린 뜻이 잘 맞아 함께 시작한 건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이 일이 진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 친구 때문에 내 맘이 변한 건지, 아니면 이 일이 원래 나랑 안 맞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후자라면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생각하며 걷고 있죠. 아직 답을 찾지 못했구요.
- 어려운 문제네요. 관계의 문제도 있고, 일의 문제도 있으니.
- 친구 때문에 사업적으로 좋은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했을 때는 친구를 원망했어요. 함께 공부하던 대학 교수님을 찾아가 그가 변하지 않는다고 불평을 늘어놓았죠. 그러자 교수님이 말씀하시더군요. “사람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자기 자신 뿐이지.”라고요. 그 말을 듣고 보니, 내가 어리석게 느껴졌어요. 나도 친구의 의견을 듣지 않으면서 그가 내 뜻대로 변하기를 바랐으니까요. 또 이런 말씀도 덧붙이셨어요. 자신을 바꾸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 그나마 그게 제일 쉬운 일 아니겠냐고.
수연과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우리는 왜 잊고 사는 걸까?
프랑스인이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물었다.
- 순례길을 반 이상 걸었어요. 두 사람은 돌아가면 무엇을 하고 싶나요?
서진이 대답한다.
- 난 돌아가면 기타를 배울 생각입니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아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죠. 그런데 여기 순례자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순수한 기쁨을 느끼면서 자신에게 좋은 에너지를 주고 있더군요.
수연이 대답한다.
- 글쎄요. 난 하고 싶은 일은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연인과 헤어진 일에 대한 감정 정리를 위해 온 여행이라 그것만 돼도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아마도 내가 돌아가서 제일 먼저 할 일은 그를 놓아주는 거겠죠? 그에게 잘 가라고 말해줘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