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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산책 Oct 29. 2020

지금 여기에 존재하다

1) 수연과 윈디

수연은 그녀가 무척 반가웠다. 그녀는 윈디의 얼굴에서 어렴풋이 ‘기쁨’이라는 감정이 읽히는 것을 느꼈다. 전에 만났을 때는 표정을 읽을 수 없었는데 신기하다고 생각한다.

-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 뭐가 고마운가요?

- 불행하다고 느꼈던 감정에서 벗어나게 해 준거요.

- 이제 행복한가요?

- 예전보다는요.

- 어떤 점이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요.

- 일단 그의 생각에서 벗어나고 있어요. 당신 말대로 감정이 일어나면 흘러가게 둬요. 아직은 훈련이 더 필요하지만요.

- 좋아요.

그녀가 더 말해보라는 듯 미소 짓고 수연의 눈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 그리고 순례길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주변 풍경에 관심이 생겼어요.

- 좋아요. 계속 말해 봐요.

- 힘들어서 도망 온 여행이 이제 기쁨을 주는 여행으로 바뀌고 있어요.

- 그렇군요. 그 기쁨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요?

윈디가 묻고, 수연과 함께 대답한다.

- 나 자신(From myself)이요.

두 사람은 함께 웃는다.


- 이제 수연 씨는 지금 여기에 있군요.

- 저는 항상 그래 왔는걸요.

- 그랬다고 착각하기 쉽죠. 하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대부분은 과거에 있었던 일이나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라는 거 알아요?

- 그런가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 ‘어제 나는 왜 그랬을까?’ 또는 ‘그 일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등을 생각하며 살잖아요.

- 당연히요.

- 그런 생각을 할 때 기쁨이 느껴지나요?

- 아니요. 기쁨보다는 걱정인 것 같아요.

- 그런 생각들이 과거나 미래를 바꾸는데 도움이 되나요?

-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그냥 생각이 떠오르니까 하는 거죠.

- 맞아요. 그런데도 그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죠.


윈디가 빙긋 웃더니 묻는다.

- 당신은 이 여행에서 어느 때 기쁨을 느꼈나요?

- 새로운 환경과 사람들을 만날 때요.

- 예를 들어볼래요?

- 멋진 풍경, 시원한 바람, 따뜻한 햇볕, 물 한 모금, 순례자들과 반가운 인사, 멋진 건축물, 맛있는 음식, 시원한 맥주, 따뜻한 물로 하는 샤워 등이요.

- 어느 것도 과거나 미래와 관련된 것은 없네요. 모두 여행 순간순간 마주치는 것들이잖아요.

- 그러네요.

- 그게 바로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거예요. 현존이라고도 하죠. 몸도 여기 있고, 마음도 여기 있는 거죠.  지금 이 순간을 깊이 사는 거예요.

- 그럼 의식적으로 생각을 여기에 있게 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건가요?

- 의지를 갖는다기보다 지금 여기에서 신체적, 감정적 경험을 충실히 해보는 거예요. 우리의 오감을 통해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충분히 느껴보는 거죠.

- 오감을 통해 느끼면서 지금 여기에 있어라?

수연이 윈디의 말을 정리한다.

- 맞아요.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면 생각에 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어요.

- 노력해 볼게요. 당신이 지난번에도 도움을 줬으니까 이번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요.

-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당신 스스로 자신을 돕고 있는 거예요. 난 그저 단서를 줄 뿐이죠.


두 사람은 가벼운 포옹과 인사를 나누고 각자 머무는 숙소로 발걸음을 옮긴다. 수연은 가는 동안 이 순간을 오감을 통해 느껴보기로 한다. 땅을 짚는 발의 압력, 얼굴을 스치는 공기의 온도와 습도, 주변의 냄새와 풍경들. 이제 의식적으로 그에 대한 생각을 몰아내지 않아도 그는 더 이상 수연의 생각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는 온전히 지금 여기에 있다.    




2) 수연과 순례자들

수연은 한 걸음 한 걸음 주의를 기울이며 알베르게로 향했다. 가는 길에 만나는 주변의 풍경과 사람들을 관찰한다. 4살 정도 되는 여자아이와 몸집이 큰 개가 어울려 놀고 있다. 예전이라면 동물을 어떻게 믿고 아이를 저렇게 놀게 두는지 걱정과 불안을 느꼈을 테지만 지금은 아이와 동물이 주는 밝은 기운이 수연에게 그대로 전해진다.


숙소에 들어서자 주방에서 커피 향이 난다. 지나칠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이다.

- 아! 좋다.

수연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 내어 말하고는 깜짝 놀라 웃는다. 그녀는 주방으로 들어가 커피를 내리고 있는 순례자에게 말을 건넨다.

- 커피 향이 정말 좋아요.

- 한 컵 줄게요. 기다려요.

그는 30대 중반의 프랑스인이었다. 그가 물었다.

- 여행이 즐거운가요?

- 즐거워지고 있어요. 당신은요?

- 아직 잘 모르겠어요.

수연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녀의 표정을 본 그가 말한다.

- 지금 내 걱정을 하는 거예요. 걱정 말아요. 내 일은 내가 할 수 있어요.

그가 환하게 웃으며 말한다.

- 오늘 저녁 여기에서 함께 식사할래요? 순례자들끼리 조촐한 파티를 하기로 했어요.

- 좋아요.

수연은 몸을 씻고 윈디와 만난 이야기를 간단하게 기록한 후, 주방으로 내려간다.


저녁을 함께 하는 순례자는 수연을 포함해 7명이었다. 30대 프랑스 남자, 50대 체코 여자, 30대 일본 여자, 60대 독일 부부, 그리고 40대 한국 남자. 그는 서진이었다.

와인과 따빠스(식사 전 술과 곁들여 간단히 먹는 소량의 음식)를 먹으며 한껏 분위기가 부드러워지자 프랑스 순례자가 말을 꺼냈다.

- 여러분은 머릿속이 시끄러울 때 무엇을 하며 그 상황에서 벗어나는지 궁금합니다.

50대 체코 여자가 말한다.

- 난 밖으로 나가 하늘을 봐요. 어느 것 하나 똑같지 않은 제멋대로 생긴 구름 덕분에 매 순간 다른 풍경을 볼 수 있죠. 가까이 가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상은 수증기만 있을 테죠. 실체가 없는 것이 내 생각과 같다고 생각해요. ‘내가 실체도 없는 것에 마음을 뺏기고 있구나!’ 그런 깨달음이 나를 편안하게 해 줍니다. 다양한 구름처럼 내 마음도 자유로워지죠.

 

다양한 구름처럼 마음이 자유로워지다

30대 일본 여자가 말한다.

- 난 춤을 춰요. 음악과 거울만 있으면 몰입을 경험합니다. 춤추는 내 모습을 보면서 몸의 움직임을 관찰하죠. 거기에 음악이 큰 역할을 해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끔 나를 마구 털어대거든요. 그렇게 실컷 움직이고 나면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는 걸 느껴요.

수연이 말한다.

- 저는 청소를 해요. 머릿속을 치울 수 없으니 대신 집을 치우죠. 몸을 움직이면서 사물이나 공간이 깨끗해지는 것을 보면 기쁨을 느낄 때도 있어요. 그 순간만큼은 마음이 잠잠해져요.

30대 프랑스 남자가 말한다.

- 저는 바이올린을 연주합니다. 왼손의 운지, 오른손의 활 기울기로 음을 내는 작업이 나를 그 순간에 붙잡아 둡니다. 그런 시간을 가지고 나면 기분 좋은 에너지가 생긴 것을 느껴요.

독일인 남자가 말한다.

- 우리는 정원을 가꿉니다. 계절의 옷을 입은 자연을 보는 일, 살아있는 생명을 보는 일 그리고 단순하지만 지속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일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지켜준다고 생각해요.

그는 말을 마치고 아내와 와인 잔을 부딪친다. 그의 아내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수연은 ‘지금 여기에 있으려고 노력하라’는 윈디의 말이 떠올랐다. 자신도 모르게 그런 시간을 보낸 적이 있으며 그럴 때 순수한 기쁨이 나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모인 순례자들도 현존을 통해 머릿속 혼란을 다스려 왔음을 알 수 있었다.

반면에 서진은 바이올린을 연주한다는 프랑스인의 말을 듣고 자신도 기타 연주를 하고 싶었던 때를 떠올렸다. 그는 일에 매진해오며 기타 연주와 같은 취미 생활은 언제든 여유가 생기면 배우겠다고 뒤로 미뤄두었던 것이 벌써 20년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머릿속이 시끄러워지면 무엇을 하는지 말할 수 없었다. 그동안 스트레스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다들 그렇게 사는 거라고 자신을 몰아세웠다. 아내가 ‘그만 하자’고 했을 때에야 비로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한꺼번에 혼란이 몰려왔다. 23일 동안 순례길을 걸었지만 자신은 어떤 위안도 해답도 얻지 못했다. 갑자기 씁쓸한 마음이 들어 와인을 연거푸 들이킨다.


다음 편에 계속...


* 커버 이미지 출처: fli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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